"이제 와서 그 돈으로 어딜 가라고…" 입주 앞두고 '날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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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아파트 입주예정자 '분통'
장릉서 계양산 보여야
부분철거 기술 검토
철거 이뤄지면 입주예정자에 분양가 보상 전망
"이제 와서 그 돈(분양대금)으로 어딜 가겠습니까. 청약통장도 이미 써버렸는걸요."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김포 장릉의 경관을 가린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아파트에 대해 문화재청이 부분철거를 검토하면서 피해를 호소하는 입주예정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29일 문화재위원회 궁능분과와 세계문화유산과 합동심의를 열어 김포 장릉 앞 아파트에 대한 대방건설·대광건영·금성백조의 개선안을 보류했다. 건설사들의 개선안에는 아파트 외관에 장릉을 강조하는 색을 칠하거나 야외에 육각정자를 두겠다는 등의 방안이 담겼는데, 이러한 방법으로는 장릉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판단이다.대신 문화재청은 별도의 소위원회를 꾸려 아파트 단지별로 능선에 따라 자르거나 높이에 맞춰 자르는 등 부분철거가 가능한지 기술적 검토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그 부인인 인헌왕후가 묻힌 장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 중 하나다. 조선 왕릉은 뒤에 '주산'과 앞에 '조산'을 두는데, 장릉 인근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가 조산인 계양산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판단이다.
문제는 3400여가구에 달하는 입주예정자들이 입을 피해다. 꼭대기 층(20~25층)까지 골조 공사가 마무리된 이들 단지에는 내년 3~6월께 입주가 예정된 상태다. 공사 지연으로 입주가 늦춰지며 발생하는 피해도 있지만, 입주 시기에 맞춰 살던 집을 처분하거나 대출을 진행하고 생애 첫 주택 구입을 위해 청약통장을 사용한 경우도 있어 철거 명령이 내려지면 막대한 재산 피해가 우려된다.
부동산 커뮤니티나 해당 아파트 입주예정자 온라인 카페 등에는 철거가 현실화될 경우 발생할 피해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한 입주예정자는 "생애 최초 주택 구매를 위해 청약통장을 썼는데, 만약 입주하지 못하게 되면 청약통장은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냐"는 걱정을 공유했다. 다른 입주예정자도 "최근 집값이 많이 올라 분양받길 잘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주를 얼마 앞두고 날벼락을 맞았다"며 "이제와서 분양대금을 받는다고 해봐야 어딜 가겠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문제가 된 아파트 단지는 건설사들이 2014년 택지 개발 허가를 받은 땅을 사들여 2019년 인천 서구청에게 건축허가를 받고 분양과 함께 공사를 시작한 곳이다. 문화재청은 2017년 1월 김포 장릉 반경 500m 안 높이 20m 이상 건축물은 개별 심의한다고 관보에 고시하고 인근 지자체에 통보했지만, 인천 서구청을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허가를 내줬다. 건설사들이 강화된 규제를 알고서도 현상변경 허가를 받지 않고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문화재청의 공사중지 명령에 맞서 건설사들이 제기한 공사 중지 가처분 신청 소송에서 법원은 "(수분양자에게) 금전 보상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보기도 어렵다"며 건설사가 입주예정자에게 피해를 보상하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현재 부동산 시세는 분양을 했던 2019년에 비해 대폭 오른 상황이다.
KB리브부동산에 따르면 아파트 분양이 이뤄졌던 2019년 11월 인천의 평균 아파트 가격은 2억7289만원이었으나, 올해 10월에 4억2470만원으로 훌쩍 뛰었다. 평균 전셋값도 2억8056만원에 달해 과거 집값을 웃돌고 있다. 분양금액을 보상받더라도 새 집을 구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적인 문제다. 이미 사용한 청약통장에 대해서는 해결할 방법도 없는 처지다.문화재청의 심의 절차를 어기고 왕릉 근처에 건축물을 지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기에 철거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는 점도 입주예정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지난 9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록된 ‘김포 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은 20만명 넘는 동의를 받았다. 문화재청 게시판에는 "아파트를 그대로 두면 나쁜 선례가 생기는 것" "조경을 지키지 못하면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삭제될 수 있다"는 글이 다수 게제됐다.
문화재청은 이달 초 중으로 소위원회의 기술적 검토를 마치고 다시 문화재위원회 분과 위원회를 소집해 '왕릉 뷰' 아파트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추가 검토 가능성과 심의 절차 등을 감안하면 당분간 현재의 갈등 상태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