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수천억 투자한 기술인데…탈원전 이유로 안 쓴다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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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효성, BHI 등 i-SMR 기술개발 참여정부가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 기술을 개발해도 수출용으로만 쓰고, 국내엔 짓지 않기로 했다. 탈(脫)원전 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각국 정부가 탄소배출량 감축의 도구로 SMR을 적극 활용하겠다고 나선 것과 대조된다. 원자력 업계는 “쓰지 않는 물건을 팔겠다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며 SMR을 국내에서도 활용해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원전업계 "탈원전 도그마에서 빠져나와야"
1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9월2일 5832억원 규모의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 개발 사업 예비타당성 조사를 신청하면서 사업 목적에 ‘수출을 위한 개발’이라고 명시했다. 수천억원을 투자해 혁신형 기술을 개발해도 국내에선 쓰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부 관계자는 “i-SMR은 해외 수출을 위해 기술 개발에 나선 것”이라며 “SMR을 포함해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다는 정책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i-SMR 예타는 지난달 말 기술성 평가를 통과했다. 내년 2월까지 경제성 평가가 완료되면 예산안에 반영하는 일정이다. 2023년부터 기술개발에 돌입해 2029년부터 상용화에 나서는 게 목표다. 정부는 3986억원을 지원하고, 한국수력원자력을 포함한 민간 기업이 1846억원을 투자한다. 혁신기술개발(2410억원)은 정부가 주도하고, 설계(2282억원)와 제조기술(1140억원) 분야는 정부와 민간이 절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민간 기업 중엔 두산중공업, 효성중공업, 비에이치아이 등이 참여한다.
SMR은 발전량 300MW 이하 원자로를 가진 소형 원전이다. 공장식 생산이 가능해 건설 기간을 줄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또 방사능 유출 가능성도 지금의 1000분의 1 수준으로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게 원전 업계의 설명이다. 발전용수가 적게 들어 해안이 아닌 내륙에도 건설이 가능한 것도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은 2012년 세계 최초의 SMR인 스마트원전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경제성을 등을 이유로 아직까지 상용화에 나서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엔 탈원전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사실상 기술이 사장됐다. 한국에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전세계에서 탄소중립 실현 방안으로 SMR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다. 미국, 영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중국 등 18개 나라에서 76개 업체가 다양한 노형의 SMR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2020년 미국 뉴스케일파워가 SMR 설계 심사를 통과하면서 기술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뉴스케일파워의 SMR은 원자로 모듈을 수조에 잠기게 해 외부 충격에도 방사선 누출 위험을 대폭 줄인 게 특징이다. 정부가 이번에 개발하는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은 한국의 스마트원전과 미국 뉴스케일파워 기술을 융합하는 방식이다. 격납고가 필요한 스마트원전은 부피가 커서 수출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했다. 프로젝트에 참가 중인 한 원전 전문가는 “i-SMR개발은 뉴스케일의 기술 특허를 피하면서 스마트원전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원자력 업계는 i-SMR 개발을 환영하면서도 국내에 짓지 않은 원전을 해외에 수출하겠다는 정부의 발상 자체가 상식에 어긋난다며 반발하고 있다. 스마트원전부터 국내 실증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는 i-SMR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실증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미적대는 사이에 SMR 선두국가였던 한국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며 “지금이라도 SMR은 국가 에너지 계획에 포함시키는 등 탈원전 도그마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훈/정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