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공인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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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반란·헌정질서 교란 원죄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타계했다. 이후의 국가장 논란을 지켜보면서 공인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외교·민주화 이행 기여
역사적 평가 엇갈리는 노태우
이분법적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功過 함께 평가·객관적 접근 필요
이영조 <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군인 노태우에 대한 평가가 모든 것을 덮고 있다. 고인은 1979년 12·12 당시 9사단장으로서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키는 등 군사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듬해 전두환 신군부의 5·17 계엄 확대 등에도 관여했다. 이처럼 헌정질서를 교란시킨 행위는 그로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원죄가 됐다.5공화국 출범 후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고인은 전두환 정권에서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 7년간 2인자로 버틴 그는 1987년 민정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같은 해 6월 민주대항쟁에서 직선제 요구가 거세게 분출하자 ‘전두환의 뜻을 거슬러’ 6·29선언을 통해 이를 전격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 감독, 노태우 주연’의 이 정치 쇼 덕분에,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힘입어 같은 해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노태우의 6공(共)은 전두환의 5공(共) 태중에서 자라났다. 이 때문에 6공은 일각에서 6공이라는 표현조차 거부할 만큼, 5공의 연장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평가도 그만큼 박했다. 한국갤럽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2015년 7월 말~8월 초 전국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을 조사한 결과 노 전 대통령은 0.1%로 최하위였다.하지만 군사반란과 5공이라는 태생의 한계는 역설적으로 노태우 정부가 민주 이행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끊임없이 5공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결과 5공 청산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취임 직후에 있었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의석 감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윤환 의원을 위시한 전두환 측근을 대거 공천에서 배제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의 압박도 있었지만, 5공청문회와 광주청문회에 동의했다. 청문회 끝에 전두환은 국민에 사과하고 강원 설악산 자락 백담사로 자의 반 타의 반의 유배 길에 올랐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의 책임론에서 벗어나자는 동기도 있었겠지만, 광주민주화운동 참여자에 대한 보상을 시작함으로써 과거사 정리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도 노태우 정부였다.
민주화 이후 많은 나라가 직면하는 숙제 가운데 하나는 기예르모 오도넬이 ‘권위주의의 여왕’으로 칭한 군부에 대한 통제다. 군부세력을 성공적으로 견제한 것도 그의 군 경력 덕분일 수 있다. 한국이 군의 정치 개입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신생 민주국가가 된 것은 군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이 군부 개입의 지니를 병 안에 가두고 후임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 해체로 완전히 봉인했기 때문이다.
경제 실적도 괜찮았다. 이전에 비해 약간 둔화했지만 경제는 연 10% 안팎의 성장을 계속했고, 임금은 115% 올랐으며, 중산층 비율은 75%를 넘었다. 가장 인상적인 경제정책은 ‘주택 200만 호’ 건설이었다.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수도권 1기 신도시를 건설해 집값도 잡고 주택 보급률도 높였다. 1989년 국민의료보험제도를 개정해 의료보험 수혜 비율을 92%로 끌어올린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비 부담이 줄었다.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북방외교였다. 노태우 정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 동구권 몰락, 소련의 개혁·개방이라는 세계사적 전환을 활용해 소련·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도 그 연장선상에서 가능했다. 모든 남북 합의를 무시하기 일쑤인 북한조차 필요할 때면 노태우 시대에 만든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들고나온다.
공(功)이 과(過)를 덮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 때문에 공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도 옳아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의 접근법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다. 2006년 중국 공산당정부는 마오는 공이 7, 과가 3이라는 식으로 평가했다. 어쩌면 우리도 이분법적인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공과를 함께 평가하는 객관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