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 빔'에 눈먼 코인거래소…영문백서 달랑 올리고 "번역기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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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코인 상장 열올리는 거래소암호화폐시장에서는 이따금씩 ‘상장 빔’이 쏘아올려진다. 대형 거래소가 새 코인을 상장하면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을 말한다. 업비트가 지난달 27일 원화마켓에 올린 ‘1인치’라는 암호화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초가 4165원에서 2만3300원까지 직행했다가 12시간 만에 6000원대로 급락했다. 2일에는 5000원대 초반으로 더 떨어졌다. 상장 첫날 1인치에는 3조원에 육박하는 거래대금이 몰렸다. 업비트와 계좌를 연동한 케이뱅크 서버가 접속 폭주를 견디지 못해 멈출 정도였다.
'1인치' 상장효과로 거래대금 3조
업비트, 코인하나로 수십억 수익
관련정보 모두 영어 "알아서 봐라"
투자자 정보제공은 여전히 '뒷전'
상반기 상폐 때와 분위기 바뀌어
잡코인 거래비중 80~90% 달해
코인을 사고팔 때마다 0.05%를 수수료로 떼는 업비트는 이 코인 하나로만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런데 1인치에 대해 업비트에서 볼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디파이(DeFi) 비용을 낮춰준다’는 요지의 230자(字) 설명이 전부다. 백서(사업 계획서)와 홈페이지는 영어로 돼 있다. 기자는 업비트 고객센터에 ‘1인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데 정보를 구할 수 없느냐’고 문의했다. 31분 뒤 무미건조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움 드리기 어렵다. 번역기를 쓰시라.”
“상장 빔 온다” 잡코인 다시 들썩
정부가 주도한 ‘코인시장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서 암호화폐거래소는 사실상 4대 업체(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의 독과점 체제가 됐다. 부실 거래소가 퇴출된 것은 긍정적 효과로 평가된다. 하지만 거래소들이 투자자를 위한 최소한의 정보 제공은 외면한 채 수익 극대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2일 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에 사업자 신고를 마친 거래소들이 ‘잡코인 상장’을 속속 재개하고 있다. 업비트는 지난달부터 1인치와 더불어 에이브, 마스크, 솔라나, 폴리곤, 누사이퍼 등을 상장시켰다. 누사이퍼 역시 첫날 314원에서 1만원까지 치솟았다가 이달 들어 1000원대로 하락하는 등 롤러코스터를 탔다. 코빗은 60여 종인 상장 코인 수를 100종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올 상반기 사업자 신고를 앞둔 일부 거래소가 대규모 상장폐지에 나섰던 것과 달라진 분위기다. 공격적 상장 경쟁이 상장 빔을 노린 투기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안 그래도 최근 암호화폐시장에서는 비트코인 강세가 저물고 알트코인(비트코인을 뺀 나머지 암호화폐)이 들썩이는 중이다. 이날 국내 주요 거래소에서는 샌드박스, 디센트럴랜드, 퀀텀 등이 각각 1조원어치 넘게 사고팔렸다.
알트코인에 투자 ‘쏠림’ 심화
암호화폐 정보업체 코인게코에 따르면 이날 업비트 거래대금 중 알트코인의 비중은 96.8%, 빗썸은 86.9%를 기록했다. 블록체인업계 관계자는 “해외 거래소에 비해 비트코인의 비중이 낮고, ‘대박’을 노린 투자자가 알트코인에 쏠리는 것이 한국 시장의 특징”이라고 했다. 여야가 공론화에 나선 가상자산(암호화폐) 과세 유예가 현실화할 경우 알트코인을 중심으로 한 투기 광풍이 다시 달아오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업계는 내년 1월 1일 시행이 예정된 코인 과세가 투자 심리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해왔다.금융당국의 감독권 아래 편입된 거래소들은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혼탁했던 시장이 정리된 만큼 건전한 투자문화 조성에 앞장서겠다는 다짐을 업체마다 내놓고 있다. 그러나 꾸준히 불어나고 있는 신규 상장 종목에 대한 정보 제공에는 인색한 편이다. 거래소들은 “자칫하면 투자 권유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개발사가 공개한 정보 이상을 제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항변한다.
‘건전한 투자문화’ 외치지만…
학계와 법조계에서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가상자산의 매매를 중개하는 업체로서 기본적인 고객 서비스는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암호화폐거래소는 증권시장에 비유하면 한국거래소, 예탁결제원,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일반 증권사 등으로 분화된 기능을 혼자서 다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독특한 구조 탓에 시장 질서의 투명성과 안정성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