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서 반백년' 열사 어머니 길 위의 삶…영화 '왕십리 김종분'

민주투사 故김귀정씨 모친 일상 담은 다큐
서울 왕십리역 11번 출구. 50년 경력의 '만렙' 장사꾼 김종분 할머니는 오늘도 이곳에 노점을 차려 놓고 장사를 한다. 브로콜리를 닮은 머리 모양과 허리에 찬 전대, 헐렁한 고무줄 바지까지.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노점상 할머니 모습이다.

그러나 김 할머니에게는 평범한 외양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있다.

오래전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은 둘째 딸 김귀정씨를 먼저 떠나보냈다.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가 사복경찰단인 백골단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했다.

영화 '왕십리 김종분'은 거리에서 딸을 잃은 이후에도 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김 할머니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세월호 참사 유족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를 선보인 김진열 감독이 연출했다. 김종분 할머니의 하루는 날마다 비슷하다.

청량리종합시장에서 직접 발품 팔아 산 물건을 노점에 가져다 판다.

야채부터 시작해 삶은 옥수수, 가래떡구이, 쌀강정 등 없는 게 없다. 가짓수만 보면 마음먹고 장사하는 듯하지만 돈 버는 데는 영 젬병이다.

"나머진 나중에" 하며 손님에게 외상을 주고, 그날 번 돈으로는 함께 장사하는 할머니들과 저녁을 사 먹는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왕십리로 향하는 이유는 그저 사람의 온도를 느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할머니의 노점에는 과거 김귀정 열사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성균관대학교 친구들이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람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할머니가 장사를 접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손녀 정유인씨는 말한다.

영화에는 그동안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던 김 열사의 자세한 이야기도 담겼다.

김 열사의 친구들과 언니, 남동생이 인터뷰를 통해 그때의 기억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정의롭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다큐멘터리에 공개된 그의 일기장은 등록금 걱정으로 시작된다.

이후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드는 모습이 쓰여 있다.

"지랄탄(최루탄) 까스를 맡으며 정신없이 뛰어다닌 하루였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고 말하던 그는 끝내 대한극장 근처 골목길에서 거의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눈물에도 총량이 있을 법하지만, 할머니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앞세운 딸의 묘를 찾으면 자리에 앉기도 전에 통곡한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장사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손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 말한다.

내일도 김 할머니의 노점은 열릴 것이다. 따뜻한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오는 11일 개봉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