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환 "남해 7연패 후 한 달간 잠도 못 자…바둑도 인생도 나와의 사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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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반상 1인자 박정환“그가 돌아와서 좋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내리막을 걷는 듯하던 ‘왕년의 1인자’가 다시 왕좌에 앉았다.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21)을 꺾고 26번째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우승컵을 거머쥔 박정환 9단(28) 얘기다. 그는 지난 3일 한국기원 2층 대국장에서 열린 결승 3번기 최종 3국에서 백돌을 잡고 166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초반부터 상대를 압도한 완벽한 솜씨였다. 지난해 남해에서 열린 7번기에서 신진서에게 7연패를 당한 설움을 단번에 씻어냈다.
삼성화재배 최종 3국서 불계승
전날 검토한 판이 그대로 나와
시간 아끼며 승부, 상대 압도
신진서에 1위 넘겨줬을 때 충격
이창호 "겪어봐야 이겨내" 조언
많이 경험하며 스스로 극복 중
당초 바둑계는 신진서의 우세를 점쳤다. 그는 지난해 11월 이후 세계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반면 박정환은 ‘남해 참패’ 후에도 신진서를 만나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실력과 기세 모두 열세였다. 하지만 박정환은 거짓말처럼 일어섰다. 자신을 연거푸 패배의 수렁에 빠뜨린 상대를 다시 만나 일궈낸 승리이기에 더욱 값졌다. 박 9단을 4일 서울 사당동 인근 개인 연구실에서 만났다.▷신진서 9단이 3국 166수에서 돌을 거뒀다. 예상했나.
“의외였다. 큰 승부일수록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조금 더 둘 줄 알았다. 약간 우세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상대가 신진서 아닌가.”
▷3국은 비교적 이르게 판세가 기울었다. 한때 인공지능(AI) 예측 승률이 95%에 육박했다.“신진서 9단이 1국의 포석을 그대로 썼는데, 전날 저녁에 검토한 판이 그대로 나왔다. 최선의 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아꼈다. 반면 신진서 9단은 평소보다 서두르는 느낌이 있었다. 집 손해가 나는데도 때 이르게 승부를 걸어왔다. 그래서 초반에 우세를 잡은 것 같다.”
▷흑돌을 잡은 신진서 9단이 막판에 백 대마를 집요하게 추격했는데, 사는 길을 보고 있었나.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대마가 확실하게 살지만 집은 손해 보는 길, 집을 더 얻지만 대마의 사활이 불확실한 길. 전자는 완벽하게 읽혔는데, 벌려 놓은 격차가 줄 것 같았다. 그래도 지킬 수는 있을 것 같았다.”▷대국이 끝나고 신진서 9단이 뭐라고 하던가.
“대국 한 시간 뒤에 시상식에서 먼저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더라. 정말 고마웠다. 남해에서 졌을 때 나는 축하한다는 말을 못 꺼냈다. 나이가 어린데도 그릇이 나보다 크다고 느꼈다.”▷신진서 9단과의 승부에서 진 적이 많았다. 특히 지난해 남해 슈퍼매치에선 7연패를 당했는데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한 명에게 연패를 당하는 게 참 괴로웠다. 당시 1, 2국에서 미세한 실수로 역전패를 당하면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정신력이 흔들리니 조급해졌다. 패배의 기억이 적어도 한 달은 간 거 같다. 자려고 누우면 패배한 기보가 계속 떠올랐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 보니 ‘더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한동안 소홀히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번 대회에서 결승에 먼저 진출한 뒤 “신진서 9단이 (양딩신 9단을) 이기고 올라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양딩신 9단이 상대하기는 더 편했겠지만, 중국을 상대로 우승컵을 가져와야 한다는 부담도 컸을 것이다. 신진서 9단을 만나면 오히려 마음 편히 내 바둑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부딪쳐야 할 상대이고, 언젠가는 이겨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한번 넘어 보자’ 하는 생각도 했다. 만약 지더라도 한국이 우승컵을 지키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5년간 고수한 세계랭킹 1위 자리도 2018년 신진서 9단에게 내줬지 않나.
“처음엔 스트레스가 말로 못 할 만큼 컸다. 그것도 큰 승부에서 연패를 당하면서 내려간 것이라 타격이 상당했다. ‘내려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다. 지금은 따라가는 입장이라 오히려 편해졌다. 다시 1위를 향해 잘 추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신진서 9단과의 평소 관계는 어떤가.
“사석에서는 형, 동생이라고 부른다. 대국장 밖에서 따로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까운 편인 것 같다.”
▷하루에 바둑 공부를 얼마나 하나.
“보통 ‘몇 시간씩 공부하냐’고 많이들 묻는데, 시간을 재지 않는다.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이 아니면 거의 바둑 공부를 한다. 사활을 다시 풀어보거나 AI 기보를 본다. 성과가 눈에 당장 보이진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나타난다.”
▷1970~80년대 일본 바둑계를 호령한 임해봉 9단은 ‘바둑의 신(神)이 있다면 몇 점 정도로 버틸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목숨을 건 내기라면 넉 점까지 놔야 할 것”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지금 만약 AI(커제 9단과 대국한 알파고 버전)와 겨룬다면 몇 점 정도면 버틸 수 있겠나.
“AI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 미리 둬 보고 한 수 한 수를 결정한다.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래도 초일류 기사라면 두 점 정도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롤 모델이 있나.
“이창호 사범. 바둑 스타일도 비슷하지만 늘 겸손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닮고 싶다. 큰 경기에서 지고 힘들었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명쾌한 답은 없었지만 ‘직접 겪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라. 많이 져 보면서 그만큼 많이 경험한 것 같다. 이제 겪어보고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곧 서른이다. 프로 바둑 기사로는 내리막길에 접어들 나이인데.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바둑을 이겼을 때다. 무엇을 해도 우승했을 때의 기분은 따라가지 못한다.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해서 오래 바둑을 두고 싶다. 세계랭킹 1위를 두 번 다시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1년째 퍼스널트레이닝(PT)도 받고 있다. 상대방의 행동에 흔들리지 않도록 멘털 관리도 필요하다. ‘반상무인’(바둑판 위에는 사람이 없다는 뜻)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
■ 박정환 9단은
만 13세 입단…59개월 최장 랭킹 1위조훈현, 이창호, 이세돌의 뒤를 잇는 한국 바둑의 간판 스타다. 2006년 만 13세의 나이에 입단해 ‘신동’으로 불렸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낸 데 이어 곧장 9단으로 승단하면서 아직도 깨지지 않은 ‘최연소 9단’(17세 11월) 기록을 세웠다. 2012년 6월 한국 랭킹 1위에 처음 올랐으며 2013년 12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무려 59개월간 1위 자리를 지켰다. 통산 1위 횟수 75회, 메이저 국제대회 우승만 5회에 달한다. 그의 바둑 스타일은 포석부터 끝내기까지 빈틈이 없다는 뜻에서 ‘무결점 바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