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배 웃돈' 주고 반도체 조달…"저스트 인 타임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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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공급망 관리 '시계제로'“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적기 생산방식)의 시대는 끝났다.”
"내년 사업계획도 못 짠다"
자고나면 터지는 소재·부품 품귀
에너지값마저 고공행진
"이러다 공장 멈춰"
LS일렉 등 비싼 돈 주고 물량확보 나서
車업계, 재고 가늠 못해 週단위 생산계획
마케팅도 올스톱
독일의 시스템 반도체 업체인 인피니언의 헬무트 가젤 최고마케팅책임자(CMO)가 최근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그동안 글로벌 기업들에 ‘금과옥조’로 통했던 공급망 관리 제1 법칙이 무너졌다는 진단이다. 재고를 제로로 관리하고 적기에 원부자재를 투입, 재고비용을 극단적으로 감축하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공급망 관리 ‘4중고’
8일 경제계에 따르면 주요 글로벌 대기업들이 공급망 관리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수급이 불안한 부품 및 소재는 구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쟁여놓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했음에도 수시로 공장이 멈춰선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재고를 최소화하는 공급망 관리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주요 대기업에 부족한 품목은 시스템 반도체만이 아니다. 요소수처럼 전혀 뜻하지 않은 제품이 말썽을 일으키기도 한다. 코로나19로 공급망 곳곳이 막히면서 물류비도 껑충 뛰었다. 각국의 탄소중립 움직임도 기업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원유는 물론 액화석유가스(LPG) 가격도 연일 상승세다.
현대자동차 등 최근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올 들어 주 단위로 생산계획을 짜고 있다. 월 단위로 생산계획을 짰던 지난해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차량용 반도체 등 주요 부품을 얼마나 확보할지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보니 월 단위로 계획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말썽’을 부리는 품목도 계속 바뀐다. 지난해엔 와이어링과 하네스 등의 부품이, 올해는 차량용 반도체가 생산량 정상화에 변수가 되고 있다. 자동차업계의 어려움은 생산 실적 통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 포드는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248만 대의 차량을 생산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보다 생산량이 36.2% 줄었다. 같은 기간 GM(-28.1%), 르노 닛산(-32.7%) 등의 생산 대수도 30%가량 감소했다. 비교적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대차·기아도 차량용 반도체 사태를 피해가지 못했다. 2019년 1~9월 대비 생산량이 14%가량 줄었다. 오토포캐스트솔루션은 반도체 공급난에 따른 올해 글로벌 생산 차질 규모를 1015만 대 수준으로 추정했으며 공급망 붕괴 여파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부담
기업들의 내년도 사업 계획은 ‘백지’에 가깝다. 제조업의 기본인 생산 단계에서 병목현상이 나타난 상황에서 영업 및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게 기업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투자 계획 수립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한 4대 그룹 고위 관계자는 “내년의 수요와 공급을 가늠하기 힘들다 보니 얼마만큼의 투자가 필요한지 계산이 서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매년 3분기 실적 설명회에서 이듬해 시설투자 계획을 밝혔던 삼성전자조차 “부품 수급 이슈 등 불확실성이 높아진 탓에 내년은 물론 4분기 투자에 대해서도 미리 얘기를 꺼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제조업 기업경기실사지수(BSI) 통계에도 기업들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집계한 제조업 BSI는 연일 하락하고 있다. 코로나19 종료 기대로 96까지 올랐던 BSI는 9월 94, 10월 92, 11월 87 등으로 꾸준히 내림세를 이어가고 있다. 공급망 대란이 심해지면서 경기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늘어났다는 얘기다.공급망 대란의 불똥은 소비자에게도 튀고 있다. 늘어난 제조 원가를 감당하지 못한 기업들이 앞다퉈 제품 가격을 올리는 모양새다. 미국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현지 15개 완성차 업체의 지난 9월 신차 판매가격은 평균 4만5031달러로 1년 전보다 12.1% 급등했다. 자동차업계는 가격 상승 압박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전자 업종도 높아지는 원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블랙 프라이데이’를 앞두고 이벤트가 이어지고 있어야 할 시점임에도 할인 행사들을 보기가 드물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생산된 제품도 넉넉하지 않고 물류비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비싸다”며 “대대적인 세일을 하고 싶어도 할 여건이 못 된다”고 토로했다.
송형석/도병욱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