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 독재 전환은 중남미 민주주의 퇴조의 단면"

WSJ, 서구식 민주주의 이탈·미국 영향력 축소 지적
서방식 체제 불만…"살기 바빠 권력분립 등에 관심 멀어져"

미국 정부 관리들과 정치분석가들은 니카라과 대선에서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승리함으로써 중남미에서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이어 세 번째 독재국가가 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9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들은 또 이번 니카라과 대선을 부정선거로 보고 있으며 오르테가의 집권은 중남미에서 전반적으로 민주주의가 퇴조하는 흐름의 일부로 본다고 신문은 밝혔다.

니카라과 선거관리위원회는 오르테가 대통령이 지난 7일 치러진 대선에서 75%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4 연임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자신과 맞서는 후보들 가운데 7명을 감옥에 보낸 뒤 군소 후보 몇 명만을 상대로 이번 선거를 치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투표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선거 감시 기구인 우르나스 아비에르타스는 밝혔다.

이사벨 세인트 말로 데 알바라도 전 파나마 부통령은 지난 8일 미국의 정치 전문매체인 아메리카스 쿼털리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선거로 "니카라과가 독재국가인지에 대한 마지막 의심이 사라졌다"고 썼다.

알바라도 전 부통령은 각국이 대사를 소환하거나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차관 공여를 중단함으로써 더는 이곳에서 독재체제가 등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유럽연합(EU)과 중남미 국가들도 이번 니카라과 선거를 부정선거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오르테가 대통령은 선거 다음 날인 8일 연설에서 이를 반박하며 EU는 히틀러 연합세력이었고 지금은 니카라과를 겨냥한 미국 식민주의와 간섭주의 정책의 도구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또 자신이 구금한 반대파들을 가리켜 니카라과인으로 살기를 거부한 이상 미국으로 가야 할 "양키 도적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했다. 정치분석가들은 중남미의 정치 지형이 동유럽, 터키,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식 민주주의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민주주의를 무너뜨렸고, 엘살바도르, 브라질, 멕시코에서도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독재자들이 민주적 제도에 도전하고 있다고 WSJ는 밝혔다.

칠레에 본사를 둔 여론조사기구 라티노바로메트로가 중남미 각국 주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2020년 처음 50% 이하로 떨어졌다.

2010년 조사에서는 이 비율이 63%였다.

또 2010년 44%였던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는 25%로 하락했고, 민주주의에 불만이 있다는 응답도 70%에 이르렀다.

중남미에서 가장 큰 나라인 브라질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40%에 불과했다.

또 설문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 한다면 비민주적 정부가 들어서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런 경향은 특히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가장 높았고(66%),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과테말라에서도 각각 63%와 62%, 57%로 나타났다.

브라이언 윈터 아메리카스 쿼털리 편집주간은 "독재의 악마들로부터 어렵게 배운 20세기의 교훈을 점차 잊고 있다"며 "많은 이들이 1인 지배의 마력에 유혹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중남미 지역에서 권위주의가 확산하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미국으로의 불법 이주가 늘어나는 등의 문제를 촉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도 수많은 니카라과인이 미국 국경으로 몰려들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등 정치적으로 취약한 나라들로부터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미국으로의 탈주 행렬에 가세했다.

오르테가는 '포함외교'가 더는 작동하지 못하며 강대국들이 수십 년 넘게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무시해 온 국제사회의 힘의 한계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중립적 싱크탱크인 '인터아메리칸 다이얼로그'의 마이클 쉬프터 소장은 "지구촌 전체는 물론 미국의 영향력이 가장 강할 것이라고 모두가 믿는 중미 지역에서도 미국의 힘이 쇠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르테가뿐 아니라 온두라스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대통령들도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서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및 엘살바도르 등 중미 북부 3개국을 관할하는 리카르도 주니가 특별대표는 미국 정부가 계속 니카라과를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니카라과가 최근의 사태에 대해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거나 그에 대해 해당 지역 국가들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일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것으로 우려한다"고 밝혔다.

쉬프터 소장은 중남미 소국들이 미국에 도전하는 것은 이들 나라에서 범죄조직이 득세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온두라스의 후안 올란도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그의 동생이 포함된 마약 거래 사건 등 미국 연방법원에 계류된 여러 사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동생은 올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쉬프터 소장은 "조직범죄의 심각성이 이 정도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이런 지도자들이 미국에 고분고분할까 아니면 대들까"라고 반문했다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오르테가 정부 핵심 인사들에 대한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또 니카라과의 중미자유무역협정 회원국 지위를 박탈할 것을 논의 중이다.

인구 660만 명의 니카라과는 이 협정으로 12만 5천 개의 일자리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그러나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이며 오르테가는 계속 강하게 저항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외교와 도덕적 호소 또는 그 나라 국민들만 괴롭히게 될 제재가 안 먹히는 나라를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제재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은 여러 선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베네수엘라 고위 인사들에 이어 이 나라 경제에 대해 계속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미국에 굴복하지 않고 있고, 미국이 60년간 통상을 금지한 쿠바도 여전히 건재하다.

1977년에 중남미에서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한 국가로 여겨진 나라는 코스타리카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3국뿐이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여러 나라가 군사독재 또는 일당 지배로 인한 오랜 정치적 혼란기에서 벗어난 1994년에는 오직 쿠바만이 홀로 남아 미국식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적어도 2010년까지는 중남미에서 민주주의는 비교적 건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자유로워진 언론 덕에 각종 부패 사건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대중의 환멸이 점점 커졌다.

또 세계적으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10년간 중남미 각국 경제가 후퇴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범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

싱크탱크인 중남미회계연구소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리카르도 카스타녜다는 "민주주의를 먹고 살 수는 없고, 권력 분립이나 사법부 독립 등은 그리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중남미 각국 국민들에게는 매일 식탁에 먹을 것을 충분히 올려놓을 수 있는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중남미 각국이 자국 경제를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상황으로 만든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사투를 벌이고 있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라티노바로메트로의 여론조사관 마르타 라고스는 전망했다.

그는 "만약 현재의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누군가 신천지를 약속하는 이가 나온다면 유권자들은 그를 지지할 수도 있다"며 "인기에 영합하는 지도자가 선출돼 독재로 돌아서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정부패에 진절머리가 난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나이브 부켈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미국은 그가 서서히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을 좀먹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난해에는 엘살바도르 군인들이 의회에 난입해 의원들을 겁박하며 대통령이 막강한 갱단과 싸우기 위해 요청한 차관 도입을 승인하도록 했다.

올해 초에는 부켈레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법원을 압박해 대통령 연임 금지에 관한 헌법 규정을 무효화시켜 그의 2024년 연임의 길을 열었다.

부켈레 대통령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를 가리켜 '밀레니얼 독재자'라고 부른다.

부켈레는 종종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고 나타나기도 하고 트위터에 자주 글을 올려 자신의 정책을 홍보하고 반대파를 공격한다.

얼마 전에는 트위터에 로마 황제 복장을 하고 나타나 자신을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라고 부르면서 반대파를 희롱했다.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와 멕시코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 역시 부패했다고 비난받는 정부를 상대로 싸워 민주적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단 집권하자마자 행정력을 남용해 언론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제도를 무력화하려고 한다고 분석가들은 지적한다.

대령 출신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자신이 군에 있었던 1964∼1985년 기간의 군사독재를 오래전부터 칭찬해 왔다.

그는 전·현직 군인들로 내각을 구성했으며 최근에는 의회 앞에서 탱크 퍼레이드를 벌여 의원들을 겁주려 했다는 비난을 샀다.

그는 지속해서 전자투표 시스템을 공격했고 자신에게는 재선에 성공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아니면 죽거나 세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헌법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던 그는 또 극좌 성향의 반대파와 대법원이 국민을 속이고 그들만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 맞서는 자신은 브라질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