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소동파를 키운 ‘3주(州)’의 공통점

금산에서 그려준 초상화에 시를 쓰다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 같고
몸은 마치 매여 있지 않은 배와 같네.
그대가 평생 한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황주이고 혜주이고 담주라고 하겠네.心似已灰之木 身如不系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儋州.

* 소동파(蘇東坡, 1037~1101) : 북송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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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소동파가 65세 때 하이난섬(해남도) 유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쓴 것입니다. 당시 유명한 화가가 동파의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그 그림 옆에 이 시를 적었다고 합니다. 이 시에 나오는 황주(黃州), 혜주(惠州), 담주(儋州)는 어디일까요. 황주는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동부에 있는 황저우, 혜주는 광둥성(廣東省) 중부의 후이저우, 담주는 하이난성(海南省)의 북쪽에 있는 단저우를 말합니다.

소동파는 왜 이 세 곳을 일컬어 ‘평생의 공업(功業)’을 이룬 장소라고 말했을까요. 이들 ‘3주(州)’의 공통점은 소동파가 온갖 고생을 다한 유배지였습니다.

그가 황주에 유배됐을 때는 나이 43세 때였지요. 조정을 비판하는 글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돼 감옥에 갇혔다가 이곳으로 쫓겨난 그는 농사를 직접 지으며 겨우 연명했습니다. 동쪽 언덕에 밭을 가꾸고 숨어 사는 선비라는 뜻의 ‘동파거사(東坡居士)’를 호로 삼은 것도 이때이지요. 그는 너무 가난해서 지출을 하루 150문(文)으로 정해놓고 매월 초에 4500문을 꺼내 30등분을 했습니다. 봉지에 싸서 천장에 매달아 놓고, 매일 아침 150문이 든 봉지를 하나만 꺼냈죠. 커다란 대나무통 한 개를 따로 준비해 쓰고 남은 돈을 거기에 넣었습니다. 이 돈을 모아 손님이 찾아오면 겨우 접대를 할 수 있었지요.

그 와중에도 그는 이곳에서 사망률이 높은 어린이들을 구하는 구제위원회를 만들어 백성들을 돌봤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돼지비계찜인 홍소육을 개발하기도 했죠. 약한 불에 적은 물로 푹 삶는 수육 스타일의 요리법을 적은 시로 ‘식저육(食猪肉)’을 썼고, 멀리서 온 친구와 뱃놀이를 즐기며 그의 대표작 ‘적벽부(赤壁赋)’까지 남겼습니다. 유배 시절이 오히려 약이 된 거죠.

혜주는 그가 58세 때 유배된 곳입니다. 이곳은 한족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땅이어서 유배지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혔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는 백성들을 위해 제방을 쌓고 홍수 피해를 줄이려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시도 많이 썼지요. 마지막 유배지인 담주는 아예 문명과 떨어진 미개지였습니다. 지금은 제주도 같은 관광지가 됐지만 그때는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먹을 것도 귀했죠. 쌀이 없어서 툭하면 굶었고 육고기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약품은커녕 시원한 샘물마저 드물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그는 동파서원을 개설하고 시와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생활하고 강의하던 장소는 원대(元代)에 확장한 뒤로 이 지역의 역대 최고 학부가 됐지요.

이처럼 소동파의 인생에서 황주, 혜주, 담주의 유배 시절이 없었다면 위대한 시와 글, 남다른 성찰과 결실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은 고통스러웠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그를 키우고 완성시킨 자양분이 돼 준 곳이 바로 이들 ‘3주(州)’입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