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나"···최고의 나르시시스트, 달리[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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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내가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과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사람들에게 당당히 얘기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1904~1989)입니다.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답게 달리는 자기애 가득한 얘기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달리라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그가 30대에 쓴 자서전의 첫 문장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나는 천재다"라는 말이었죠. 그의 자화자찬은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놀라운 것 같습니다. 그의 외모에서도 남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위로 한껏 말아올린 수염, 과장된 표정, 동그랗게 뜬 눈 등에서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수염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종이의 집'에 나오는 가면들의 모티브가 됐습니다. 달리의 과한 자신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기억의 지속' '나르키소스의 변형' '나의 욕망의 수수께끼' 등의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에 감탄이 나옵니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오는 27일부터 내년 3월 2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전시관에서 달리의 전시가 열린다고 하네요.
실제 달리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꼽히는데요. 달리가 자신의 꿈 자체라고 했던 그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평소 미술을 좋아했던 덕분에 달리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익혔습니다. 재능도 뛰어났기 때문에 좋은 미술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4살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17세엔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달리의 기행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성모 모리아 상을 그리라는 과제에 저울을 그려 넣는가 하면, 미술사 시험지엔 "이 답은 내가 선생보다 더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답안을 제출할 수 없다"라고 적어냈죠. 그래서 그는 결국 퇴학 당하고 말았습니다.
달리는 대체 왜 이런 독특한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된 걸까요. 그는 원래는 수줍음 많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형이 죽었는데요. 그의 어머니는 형의 이름인 살바도르 달리를 그대로 동생에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달리로부터 죽은 형의 모습을 반복해 찾으려 했죠.
달리는 이로 인해 강한 트라우마를 갖게 됐습니다. 죽은 형과 다르다는 점을 끊임없이 부모에게 부각시키고, 자신만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야 했죠. 달리는 자신은 죽은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유년 시절 발버둥 치며 지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괴짜 같은 행동으로 퇴학을 당한 달리는 이후 다양한 현대미술 양식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는데요. 이곳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초현실주의 클럽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그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은 1931년 초현실주의 클럽이 뉴욕에서 전시를 할 때 처음 소개됐습니다. 그림엔 저 멀리 바다와 절벽이 펼쳐져 있습니다. 동그란 시계들은 녹은 치즈처럼 흐물거리며 앙상한 나뭇가지와 모서리 등에 걸쳐져 있습니다. 또 일부 시계 위엔 개미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시계는 그의 억눌린 욕망을, 개미로 뒤덮은 시계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개미는 이 작품을 비롯해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죽음과 타락, 공포를 상징합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이 작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달리가 작업실을 나가려 불을 끄는 순간 본 착시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개의 흐물거리는 시계가 내 눈앞에 나타났고, 그중 하나는 올리브 나무 위에 걸쳐져 있었다"라고 설명했죠. 달리는 이렇게 환영, 꿈 등을 통해 접한 무의식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쓴 <꿈의 해석>등을 보며 잠재의식에 담긴 욕망, 꿈에 담긴 의미 등을 연구하고 작품에 접목시킨 겁니다.
달리는 무의식으로부터 특정 심상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도 고안했는데요. 하나의 이미지를 보고 전혀 다른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이젤을 침대 바로 옆에 놓아두고 잠에서 깨자마자 꿈 속 이미지를 그대로 남기려고도 애썼습니다.
이런 노력들을 달리는 스스로 '편집광적 비평 방법'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무의식을 예술적 재료로 삼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직화·체계화하는 것을 이릅니다.
실제 그는 '나르키소스의 변형'이란 작품을 그린 후 프로이트를 만나게 됐습니다. 먼저 최고의 나르시시스트가 그린 나르키소스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수많은 여인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가혹한 벌을 받게 됐죠. 나르키소스는 물속 자신을 가질 수 없어 절망하다 물에 빠져 죽었고, 그곳에선 수선화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달리의 그림 왼쪽엔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모습이 보이고, 오른쪽엔 또 다른 형상이 보입니다. 돌처럼 보이는 이 형상은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의 모습에 심취한 듯합니다. 이 형상의 머리 위엔 수선화가 피어있고, 몸엔 개미들이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넘치는 자기애와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함께 드러냈습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란 개념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확산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리는 프로이트를 만나 이 작품을 보여줬죠.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의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말했죠. 무의식을 작품에 담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달리는 이 모든 행위가 결국 의식에 해당한다는 평가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다음날 그를 소개한 주선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초현실주의자들을 터무니없는 자들이라고 여겼는데, 어제 그 젊은 스페인인의 솔직한 눈과 완성도 높은 그림을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달리는 미술뿐 아니라 영화, 상업 디자인 등에도 소질을 보였습니다. 월트디즈니와 애니메이션 '데스티노'를, 전설의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과 '스펠바운드'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츄파춥스 로고도 달리가 만들었습니다. 츄파춥스 창업자 엔리크 베르나트는 코카콜라처럼 브랜드 이미지를 한 번에 각인시킬 수 있는 로고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나트는 고향 친구인 달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 고민을 털어놨죠.
그러자 달리는 즉석에서 냅킨 위에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활용되고 있는 츄파춥스의 로고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예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팝아트'의 탄생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달리는 남다른 시선과 뛰어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를 누리다 8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작품 '나르키소스의 변형'에서 본 수선화는 다양한 꽃말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파생된 '자기 사랑' '자존심' 이란 뜻이 있습니다. '신비로움' '고결함'이란 또 다른 꽃말도 있죠. 최고의 나르시시스트 달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보다 신비롭고 고결한 작품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자기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과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사람들에게 당당히 얘기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1904~1989)입니다.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답게 달리는 자기애 가득한 얘기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달리라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그가 30대에 쓴 자서전의 첫 문장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나는 천재다"라는 말이었죠. 그의 자화자찬은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놀라운 것 같습니다. 그의 외모에서도 남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위로 한껏 말아올린 수염, 과장된 표정, 동그랗게 뜬 눈 등에서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수염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종이의 집'에 나오는 가면들의 모티브가 됐습니다. 달리의 과한 자신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기억의 지속' '나르키소스의 변형' '나의 욕망의 수수께끼' 등의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에 감탄이 나옵니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오는 27일부터 내년 3월 2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전시관에서 달리의 전시가 열린다고 하네요.
실제 달리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꼽히는데요. 달리가 자신의 꿈 자체라고 했던 그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평소 미술을 좋아했던 덕분에 달리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익혔습니다. 재능도 뛰어났기 때문에 좋은 미술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4살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17세엔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달리의 기행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성모 모리아 상을 그리라는 과제에 저울을 그려 넣는가 하면, 미술사 시험지엔 "이 답은 내가 선생보다 더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답안을 제출할 수 없다"라고 적어냈죠. 그래서 그는 결국 퇴학 당하고 말았습니다.
달리는 대체 왜 이런 독특한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된 걸까요. 그는 원래는 수줍음 많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형이 죽었는데요. 그의 어머니는 형의 이름인 살바도르 달리를 그대로 동생에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달리로부터 죽은 형의 모습을 반복해 찾으려 했죠.
달리는 이로 인해 강한 트라우마를 갖게 됐습니다. 죽은 형과 다르다는 점을 끊임없이 부모에게 부각시키고, 자신만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야 했죠. 달리는 자신은 죽은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유년 시절 발버둥 치며 지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괴짜 같은 행동으로 퇴학을 당한 달리는 이후 다양한 현대미술 양식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는데요. 이곳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초현실주의 클럽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그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은 1931년 초현실주의 클럽이 뉴욕에서 전시를 할 때 처음 소개됐습니다. 그림엔 저 멀리 바다와 절벽이 펼쳐져 있습니다. 동그란 시계들은 녹은 치즈처럼 흐물거리며 앙상한 나뭇가지와 모서리 등에 걸쳐져 있습니다. 또 일부 시계 위엔 개미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시계는 그의 억눌린 욕망을, 개미로 뒤덮은 시계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개미는 이 작품을 비롯해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죽음과 타락, 공포를 상징합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이 작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달리가 작업실을 나가려 불을 끄는 순간 본 착시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개의 흐물거리는 시계가 내 눈앞에 나타났고, 그중 하나는 올리브 나무 위에 걸쳐져 있었다"라고 설명했죠. 달리는 이렇게 환영, 꿈 등을 통해 접한 무의식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쓴 <꿈의 해석>등을 보며 잠재의식에 담긴 욕망, 꿈에 담긴 의미 등을 연구하고 작품에 접목시킨 겁니다.
달리는 무의식으로부터 특정 심상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도 고안했는데요. 하나의 이미지를 보고 전혀 다른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이젤을 침대 바로 옆에 놓아두고 잠에서 깨자마자 꿈 속 이미지를 그대로 남기려고도 애썼습니다.
이런 노력들을 달리는 스스로 '편집광적 비평 방법'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무의식을 예술적 재료로 삼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직화·체계화하는 것을 이릅니다.
실제 그는 '나르키소스의 변형'이란 작품을 그린 후 프로이트를 만나게 됐습니다. 먼저 최고의 나르시시스트가 그린 나르키소스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수많은 여인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가혹한 벌을 받게 됐죠. 나르키소스는 물속 자신을 가질 수 없어 절망하다 물에 빠져 죽었고, 그곳에선 수선화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달리의 그림 왼쪽엔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모습이 보이고, 오른쪽엔 또 다른 형상이 보입니다. 돌처럼 보이는 이 형상은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의 모습에 심취한 듯합니다. 이 형상의 머리 위엔 수선화가 피어있고, 몸엔 개미들이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넘치는 자기애와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함께 드러냈습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란 개념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확산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리는 프로이트를 만나 이 작품을 보여줬죠.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의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말했죠. 무의식을 작품에 담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달리는 이 모든 행위가 결국 의식에 해당한다는 평가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다음날 그를 소개한 주선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초현실주의자들을 터무니없는 자들이라고 여겼는데, 어제 그 젊은 스페인인의 솔직한 눈과 완성도 높은 그림을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달리는 미술뿐 아니라 영화, 상업 디자인 등에도 소질을 보였습니다. 월트디즈니와 애니메이션 '데스티노'를, 전설의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과 '스펠바운드'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츄파춥스 로고도 달리가 만들었습니다. 츄파춥스 창업자 엔리크 베르나트는 코카콜라처럼 브랜드 이미지를 한 번에 각인시킬 수 있는 로고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나트는 고향 친구인 달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 고민을 털어놨죠.
그러자 달리는 즉석에서 냅킨 위에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활용되고 있는 츄파춥스의 로고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예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팝아트'의 탄생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달리는 남다른 시선과 뛰어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를 누리다 8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작품 '나르키소스의 변형'에서 본 수선화는 다양한 꽃말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파생된 '자기 사랑' '자존심' 이란 뜻이 있습니다. '신비로움' '고결함'이란 또 다른 꽃말도 있죠. 최고의 나르시시스트 달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보다 신비롭고 고결한 작품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