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요자도 돈 못빌려"…고승범 "부채증가 빨라 대출규제 불가피"

高 "가계부채 증가율 18%로 세계최고 수준…선제적 관리 필요"
강인수 교수 "커지는 예대금리차에 은행 배만 불린다는 비판 나와"
김소영 교수 "높은 불확실성에 정책 효과 반감"…高 "유념하겠다"
고승범 금융위원장(화면 둘째 줄 첫 번째)이 지난 12일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금융정책 구상을 밝히고 있다. 이날 행사는 안현실 한경 AI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맨 오른쪽)의 진행으로 웹세미나로 열렸다. 허문찬 기자
“2016년 이후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율은 18%로 홍콩(24%)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고승범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2일 열린 제191차 한경 밀레니엄포럼 웹세미나에서 “과도한 신용에 의해 촉발되는 버블(거품)에는 정부가 사전 대응해야 한다”며 가계대출 총량규제의 불가피성을 이같이 강조했다. 포럼 토론자들은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풍선 효과’나 대출금리 급등과 같은 부작용을 보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금리 직접 개입 어렵다…모니터링은 지속”

고 위원장은 “부채가 생산적인 부문으로 흘러가지 않고 자산 시장으로 유입돼 가격 상승을 일으키고 있는 게 가장 큰 잠재 리스크”라며 “선제적이고 강력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 부채 문제도 근본적으로 금융회사의 건전성 관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맞다”며 “하지만 지금 정부 규제를 보면 신용이 높은 고신용자가 오히려 대출을 못 받고 (중·저신용자가 주로 받는) 전세대출은 규제하려다 결국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또 “우리나라 전체 담보인정비율(LTV)은 약 50%에 그치고 최근 대출 증가분만큼 자산이 함께 늘었기 때문에 금융회사의 연쇄 부실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LTV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낮은 수준, 그리고 고신용자 대출 비중이 75%에 달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금융회사의 부실 가능성은 작은 게 사실”이라면서도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내년 미국 중앙은행(Fed)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과 기준금리 인상 등이 예상보다 빨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강조했다.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풍선 효과’나 ‘규제의 역설’ 등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촉구했다. 강 교수는 “예금금리는 거의 그대로인데 대출금리만 계속 올라가고 있어 결과적으로 은행 배만 불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며 “저축은행 등에서는 가계대출이 안 되니 개인 차주에게 사업자 등록을 유도해 편법으로 대출을 내주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실수요자들조차 돈 빌리기가 어려워져 2금융권이나 사금융으로 밀려나는 등 건전성이 오히려 악화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고 위원장은 “최근 언론에서 금리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금리)에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당국자로서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며 “다만 앞으로도 금리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답했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실수요자의 정의와 전세제도 자체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 교수는 “고 위원장은 과도한 신용에 따른 버블에 사전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전세대출에선 그 기준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며 “독특하게 한국에서만 운영돼 온 전세제도의 유효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전세대출 국가 보증, 꼭 바람직한 건 아냐”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의 금융화’가 가계 부채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 교수는 “지난 정부 때부터 ‘빚 내서 집 사라’며 각종 규제를 풀었고 동시에 전세대출에 대한 국가 보증을 확대하는 등 부동산 중심의 금융 시스템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며 “여기다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이 대출을 내 줄 때 손쉬운 부동산 담보에만 주로 의존해온 것도 지금 정교한 심사를 통한 총량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2030대 젊은 층이 ‘영끌대출’과 ‘패닉바잉’에 나서면서 이들의 빚이 크게 늘고 있다”며 “그렇다고 이걸 못 하게 제한하면 ‘사다리 걷어차기’로 비칠 우려가 있어 역시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고 위원장도 이에 대해 공감을 표시한 뒤 “최근 늘어나는 가계 부채의 상당 부분이 전세대출과 집단대출 등 실수요자 대출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하 교수 지적대로 전세대출의 국가 보증이 꼭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 없다”고 인정했다. 고 위원장은 “그럼에도 전세대출은 (필수재인) 주거 안정성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규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올해 총량규제에서 전세대출을 예외로 둔 것도 이 같은 측면을 감안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고 위원장은 이에 따라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이 당초 목표인 6%에서 7% 중반까지 높아질 것으로 추정했다.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행 금융 규제의 불확실성이 커 정책 효과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DSR 규제만 보더라도 단 6개월 만에 내용과 일정이 크게 바뀌었다”며 “이처럼 불확실성이 커지면 정책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물론 실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앞으로 정책을 펼 때 가능하면 경제주체들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고 발표 전이라도 ‘시그널링’을 많이 해달라”고 당부했다.

고 위원장은 “8월에 취임 직후부터 가계부채 보완대책을 만들겠다고 예고했고 (두 달 만인) 10월에 발표했다”며 “그래도 갑작스럽다는 지적이 많은 만큼 앞으로 유념할 것”이라고 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