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신흥3강, 브랜드 혁신·M&A 앞세워 삼성물산·LF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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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패션사들, 10년간 성장정체 빠진 까닭“대기업 중심의 화섬 패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전통 3강' 기존 브랜드만 믿다가 트렌드 변화 대응 늦어
10년前보다 매출 뒷걸음…휠라·F&F·한섬 새 강자로 부상
CEO 수명 짧고 관료적 의사결정이 패션 경쟁력·성장 발목
한섬이 이달 초 박철규 삼성물산 패션부문 부사장을 해외사업 대표로 영입했다는 소식에 국내 패션업계에선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삼성의 패션을 총괄하던 시절 ‘브랜드 헌터’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1957년부터 나일론을 제조한 코오롱인더스트리의 패션 사업이 지지부진한 것도 ‘화섬 패션’의 쇠락과 맞닿아 있다.15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패션업계에서 ‘매출 1조 클럽’의 서열이 급변하고 있다. 대기업 계열 패션기업의 위력이 떨어지자 휠라, 한섬, F&F 등 신흥 명가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 확실한 브랜드 정체성, 빠른 의사 결정 등이 패션 기업들의 서열을 바꾼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정체 늪에 빠진 대기업 계열 패션사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수십 년간 국내 패션산업을 이끌었다. 패션기업 중 매출 1조 클럽 1호로 가입했다. 2010년 제일모직의 매출은 1조3912억원에 달했다. 그해 감사보고서에서 제일모직은 ‘빈폴, 갤럭시, 로가디스 등 자체 브랜드 중심의 사업을 근간으로 국내 최고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며 ‘유명 브랜드를 수입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있다’고 적었다.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삼성물산 패션 부문 매출은 1조5455억원을 기록했다. 2011년(1조6189억원)과 비교하면 10년 동안 오히려 뒷걸음질한 셈이다. 코오롱FnC도 마찬가지다. 토종 아웃도어 시장을 개척해 2011년 1조 클럽(1조1936억원)에 가입했다. 하지만 지난해 매출은 8680억원에 그쳤다. 올 3분기까지 매출은 6560억원을 기록했다.LG그룹에서 독립한 LF는 대기업 계열 패션기업 중 그나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부동산, 식품 등 사업 다각화에 성공한 덕분이다. 다만 패션 부문 매출은 2010년 1조1034억원에서 지난해 1조1159억원으로 10년 동안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대기업 중심의 ‘화섬 패션’이 차지했던 권좌는 신흥 패션강자들에 돌아가고 있다. MLB, 디스커버리 등의 브랜드를 발굴한 F&F는 2010년 2071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8376억원으로 네 배가량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3분기에만 3290억원의 매출을 거둬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조 클럽 가입을 예약해둔 상황이다.
한섬은 지난 10년 새 세 배 가까이 덩치를 키웠다. 2010년 4474억원에서 지난해 1조1959억원을 달성한 데 이어 올해는 사상 최고 실적이 예상된다. 타이틀리스트 어패럴로 ‘대박’을 친 휠라홀딩스는 올해 매출이 4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외형으로 국내 패션업계 1위 규모다.
“브랜드 발굴보다 실적 중심이 발목”
대기업 계열 패션기업들의 쇠퇴를 두고 한 대형 백화점 패션 바이어는 “빈폴(삼성물산), 헤지스(LF) 같은 트래디셔널(TD) 브랜드가 10년 전만 해도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해외 컨템퍼러리 브랜드로 선호가 바뀌었다”며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게 자전거 마크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이른바 ‘잡은 물고기의 딜레마’다. 빈폴만 해도 여전히 연매출 5000억원을 넘나드는 효자 브랜드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TD 브랜드는 남녀는 물론 키즈, 골프 등 확장성이 강한 것이 장점”이라며 “문제는 글로벌 트렌드에 맞게 변화가 힘든 데다 단기 실적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전문 경영인으로선 확실한 TD 브랜드를 버리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코오롱FnC가 매출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TD 브랜드가 없어 고전하는 것은 삼성물산과 LF가 각각 빈폴, 헤지스에 여전히 무게중심을 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전문 경영인 시스템이 패션업의 특성과 맞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LVMH그룹의 성공엔 패션 전문가인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며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이서현 사장 시절 도입했던 해외 브랜드로 버티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의 지휘 아래 해외 브랜드를 적극 발굴하고 있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대형 백화점 패션 바이어는 “대기업 계열 패션사들은 최고경영자(CEO)의 수명이 짧은 데다 외부 컨설팅에 따라 전략이 자주 바뀌어 브랜드 정체성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동휘/노유정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