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시총, 테슬라보다 커졌는데…"정부는 개념도 지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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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 연구원 잇단 영입“자산의 일정 부분을 가상자산(암호화폐)으로 보유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14억달러의 재산을 가진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9일 한 말이다. 가상자산이 자산배분의 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암호화폐가 올해 모든 자산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가상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다.
암호화폐, 올해 자산수익률 1위
"가상자산 이미 자산배분 한축
어떤 자산에 투자할지 논할 때"
'투자 길' 막힌 기관은 답답
특금법도 암호화폐 정의 모호
"당국, 명확한 가이드라인 줘야"
국내 증권사들도 가상자산을 분석하는 애널리스트를 채용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자산운용사, 투자자문사 등도 암호화폐 등에 투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하지만 국내에서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금융당국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투자가들은 가상자산 투자·상품 출시를 검토조차 하기 어렵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가상자산 분석 늘리는 韓 증권가
1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김열매 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NH투자증권의 부동산, 블록체인 및 가상자산을 맡는 애널리스트로 입사했다. 김 연구원은 카카오의 블록체인 사업을 담당하는 그라운드엑스(Ground X)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전문가로 통한다. 김 연구원은 블록체인을 중심으로 가상자산까지 분석할 계획이다. 최근 증권업계에서는 가상자산을 다루는 애널리스트가 늘어나고 있다. 한대훈 SK증권 연구원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가상자산 관련 보고서를 쓰고 있다. 지난 9월부터는 ‘디지털커런시 워치(Digital Currency Watch)’라는 제목으로 가상자산 리포트를 매주 발간 중이다.주식을 주로 다루는 여의도에서 가상자산 관련 보고서가 증가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가상자산이 자산배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올해 가상자산은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가상자산이 다른 자산들과 상관관계가 낮고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비트코인은 시가총액이 1조달러를 돌파해 테슬라의 시총보다 커졌다.오태동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미 가상자산 시장은 시가총액이 크게 부풀어 있는데 분석은 부족한 상황”이라며 “이 시장이 여전히 성장성이 높은지 혹은 거품인지에 대한 분석을 해야 고객의 자산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정의조차 모호해 투자 불가
해외 기관들은 분석을 뛰어넘어 직접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소방관 구호·퇴직급여 펀드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직접 매입했다고 지난달 밝혔다. 이 펀드는 55억달러의 자산을 보유 중이다. 이뿐만 아니라 개인투자자를 위한 가상자산 관련 상품 역시 하나둘씩 출시하고 있다. 지난 3월 캐나다에선 가상자산에 직접 투자하는 퍼포스 비트코인 ETF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출시됐고, 미국에서는 지난달 가상자산 선물에 투자하는 ETF가 잇따라 나왔다.글로벌 금융시장의 이 같은 흐름에 한국은 동떨어져 있다. 현재 가상자산은 법적인 금융상품으로도, 일반상품으로도 분류돼 있지 않다. 가상자산이 명시된 법으로 특정금융정보이용법(특금법)이 생겼지만 자금투명성에 초점이 맞춰진 탓에 여전히 가상자산 정의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한국 주요 기관투자가들은 사실상 가상자산에 직접 투자할 수 없다. ETF 등 상품을 출시할 수도 없다.심지어 국내 한 일임투자사는 비트코인 선물을 담는 미국 ETF를 포트폴리오에 편입하겠다고 했다가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지당하기도 했다.
한 자산운용사 최고투자책임자는 “올해 모든 자산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자산이 암호화폐”라며 “앞으로 자산배분을 논할 때 가상자산에 투자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자산에 투자할지를 얘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가에선 가상자산과 관련해 금융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관투자가가 투자 대상에 가상자산을 넣으려면 가상자산이 어떤 상품인지에 따른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며 “법적 지위가 모호한 가운데 위험을 적절히 감수할 수 있는 기관투자가는 가상자산을 편입할 수 없고, 개인투자자가 직접 투자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