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은 세상을 고친다 [한경 코알라]

백훈종의 알쓸₿잡
▶11월 17일 한국경제신문의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코알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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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티파니를 인수한 루이뷔통

티파니(Tiffany & Co.)는 아름다운 디자인과 나름(?) 합리적인 가격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미국의 유명 보석 브랜드이다. 작년 9월, 이 회사는 프랑스의 유명 명품 업체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에 158억 달러(약 17조 원)에 인수되었다. 프랑스 국민기업이 미국의 대표 보석 브랜드를 인수한다는 사실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며 살짝 양국의 자존심 싸움 양상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히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었던 부분은 루이뷔통이 인수대금 17조 원을 마련한 방법이다.

루이뷔통은 티파니 인수대금 마련을 위해 75억 유로의 유로화 표시 채권과 110억 파운드의 영국 파운드화 표시 채권을 각각 발행했다. 2~11년 사이의 만기로 발행된 이 채권들의 금리는 대체로 0~1% 사이로 매우 낮은 편이었는데, 일부 채권의 경우 심지어 실질금리가 -0.7%로 발행되기도 했다. 채권이 마이너스 금리로 발행되었다는 뜻은 루이뷔통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오히려 루이뷔통에 이자를 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대관절 누가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까지 내주냐는 말이다. 이 수상쩍은 채권거래의 뒤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자리하고 있었다. ECB는 1890억 유로 규모로 조성된 회사채 매수 프로그램을 통해 루이뷔통이 발행한 0% 금리 채권들을 웃돈까지 쳐서 사줬다.결과적으로 럭셔리 제국의 황제,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 유럽 최고의 부호라 불리는 루이뷔통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ECB의 도움 덕분에 돈 한 푼 안들이고 17조 원을 조달하여 공짜로 티파니를 인수할 수 있었다.

시장경제를 이해한 조선의 학자

ECB가 보인 모습은 필자가 알고 있는 중앙은행의 역할과는 너무나도 괴리가 있는 행태이다. 과연 ECB가 무슨 이유로 유럽 최고 부자의 개인 대출 창구 역할을 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이는 명백히 국가의 시장 가격 교란 행위에 해당한다.조선시대, 추수가 임박한 가을에 전국적으로 큰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 농부들이 추수를 못 해 쌀이 귀해지자 한양의 장마당에서는 쌀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열 배에 쌀값을 올리며 폭리를 취하는 상인까지 등장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결국 이 사실이 임금인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조는 당장 폭리를 취하는 쌀장수들의 몫을 치라고 명령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백성들의 주식인 쌀을 가지고 폭리를 취한다니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신하 중 연암 박지원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한양의 쌀값이 폭등했다는 말을 듣고 전국의 쌀장수들이 귀한 쌀을 가지고 모여들고 있는데 이들을 죽이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다행히 영민하던 정조는 박지원의 말뜻을 이해하여 그대로 믿고 따랐고 한양의 식량 사정은 곧 회복됐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 한경DB

가격이 중요한 이유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격은 지식이자 정보를 전달하는 신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특정 상품의 생산 기반 시설이 심각하게 파괴된 상황을 그려보자. 전 세계에 구리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나라는 칠레인데, 2010년에 지진으로 타격을 받아 구리 광산도, 구리를 수출하는 항구도 손상을 입었다.

세계 시장에 구리 공급량이 줄어들자마자 구리 가격은 6.2% 올랐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 사실만 가지고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유인을 얻는다. 필요한 정보가 가격이 상승한 사실 자체에 모두 들어있으므로 굳이 칠레의 지진피해 상황까지 일일이 파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리가 필요한 회사들은 필요하지 않은 만큼은 구매를 미루고 대체품을 찾는다. 반면 구리 채굴회사는 가격이 오른 덕분에 생산량을 늘려 한몫 잡을 동기를 얻는다. 결국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찾고 가격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공짜점심의 문제

중앙은행이 도입된 현대 경제는 돈의 수요와 공급, 그리고 돈의 가격인 이자율을 철저히 중앙에서 조종한다. 자본시장에서 투자의 기회비용은 발생하지 못한 소비이고, 소비의 기회비용은 발생하지 못한 자본 투자다. 이 관계를 조절하는 가격이 바로 이자율이다. 투자를 원하는 수요가 늘어나면 이자율이 올라가 저축자가 더 많이 저축할 유인을 얻는다. 이자율이 떨어지면 투자자는 투자를 늘려 생산성이 더 높은 방식을 도입하려 한다.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공짜 돈을 빌려준 ECB는 이러한 근본적 상충관계를 무시한 채 소비자 (베르나르 아르노)가 소비를 포기하지 않아도 은행이 새로 돈을 찍어 투자 자금을 댈 수 있게 해준 셈이다. 이는 중앙은행이 자본시장에 개입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과잉 투자다. 과잉 투자가 결실을 보지 못하면 망하는 기업이 늘고 온 나라의 실업률이 올라간다. 이처럼 한 나라 전체에서 과도하게 확대된 사업이 동시에 실패하는 사건을 불황이라고 한다.

건전화폐의 필요성

중앙 계획에 따라 공급량이 결정되는 현대 신용화폐는 애초부터 통제의 대상이므로 정확한 가격 신호를 내지 못한다. 반면, 시장에서 선택된 건전화폐는 가격 탐색과 개인별 의사결정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자유 시장이 돌아가게 만든다.

중남미의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는 자국 화폐가치 하락을 견디지 못해 미국 달러를 법정화폐로 도입했지만, 무한정 달러를 찍어내는 미 연준 덕에 그전보다 더 심각한 경제 위기로 빨려 들어가던 중이었다. 혼란 속에 정권을 잡은 젊은 지도자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특이하게도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공식 도입했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한경DB
비트코인이 공식 화폐가 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지만, 엘살바도르는 이미 반전을 맞이하고 있다. 트위터에서 #elsalvador를 검색해 보기만 해도 그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전에는 이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수도 산살바도르의 스타벅스에서 비트코인으로 커피를 사 마시고 인증사진을 올린다. 전 세계 구글 검색량도 비트코인 도입 이전보다 2~4배 가까이 올랐다.
12개월 ‘El Salvador’ 검색량 추이 / 출처: 구글 트렌드
화산 지열을 통한 친환경 비트코인 채굴, 비트코인 ATM 보급, 비트코인 결제를 위한 다양한 인프라 도입까지. 원래 해외 노동자 200만 명이 보내주는 달러가 국내총생산(GDP)의 22%를 차지하던 이 가난한 나라는 비트코인 도입 이후 외자를 유치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물론 아직 구체적인 성과가 드러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필자는 요즘 이런 생각까지 든다. 19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처럼 2020년대엔 중남미의 호랑이가 탄생하지는 않을까?건전화폐, 즉 비트코인은 세상을 고친다. 비트코인이 앞으로 어떻게 세상의 문제들을 고쳐나갈지 기대해 보자.
백훈종 샌드뱅크 COO는…

안전한 크립토 투자 앱 샌드뱅크(Sandbank)의 공동 창업자 겸 COO이다. 가상자산의 주류 금융시장 편입을 믿고 다양한 가상자산 투자상품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샌드뱅크를 만들었다. 국내에 올바르고 성숙한 가상자산 투자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각종 매스컴에 출연하여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