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윤성근 판사 위해 동기가 뭉쳤다…사법연수원 14기 전자책 발간

한경 칼럼 등 기고문·녹취 모아
'법치주의 불꽃' 이틀 만에 완성
각계 인사 34명 추천사
서문은 윤판사 위해 백지로 남겨
말기 담도암으로 투병 중인 윤성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62·사진)를 위해 사법연수원 동기들이 48시간 만에 400쪽에 가까운 책을 완성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강민구 부장판사(전 부산지방법원장)는 최근 윤 부장판사의 언론 기고문과 강연 녹취록 등을 모은 전자책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을 펴냈다. 윤 부장판사의 사법연수원 14기 동기인 강 부장판사는 동기 187명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윤 부장판사의 한국경제신문 칼럼 등 기고문과 판결 기사 등을 모아 이틀 만에 마무리했다.강 부장판사는 2002년 대구지법 부장판사로 같이 부임하면서 윤 부장판사와 깊은 인연을 쌓았다. 그는 “윤 부장판사의 글을 항상 관심 있게 보고 있었으며 한두 해 전 기고문을 엮어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며 “최근 아들 결혼식에 휠체어를 타고 온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출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윤 부장판사는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군법무관을 거쳐 법무법인 김앤장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98년 인천지법 판사로 임관해 서울남부지법원장(2015∼2017년)을 지낸 뒤 재판부 업무에 복귀했다. 윤 부장판사는 현재 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한국국제사법회·국제거래법학회 고문을 맡고 있다. 또 여러 차례 유엔국재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전문가회의 대한민국대표단을 맡은 국제법 전문가다.그의 대표적인 판결은 옥시가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가습기 살균제 허위광고 시정명령 취소소송 판결이다. 윤 부장판사는 “옥시가 검증되지 않은 사실로 인체에 안전하다고 표시했다”며 당시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대중에게 알리기도 했다. 이 사건의 판결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살균제에 대한 한국어 자료가 부족해 직접 영문자료를 찾는 열정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강 부장판사는 “법조계 인사뿐 아니라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판결문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윤 부장판사는 사람을 향한 시선이 따뜻한 판사였다”며 “구속영장 발부와 인신 구속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언론을 통해 수차례 기고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윤 부장판사의 별명은 ‘영국신사’라고도 했다. 강 부장판사는 “법정에서도 재판 당사자와 변호사에게 항상 신사다운 모습으로 대했고, 이 때문에 변호사들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전했다.

윤 부장판사는 현재 말을 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주위 사람들이 전했다. 윤 부장판사의 첫째 아들인 윤진석 변호사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항상 제게 해주시던 말씀”이라며 “인생의 답을 구할 만큼 존경할 수 있는 분을 아버지로 만났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했다.

392쪽에 이르는 이 책에는 동기 법조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4명의 추천사가 실렸다. 추천사에는 윤 부장판사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가 담겼다. 다만 저자의 발행 취지 등을 담은 서문은 윤 부장판사를 위해 날짜와 이름만 적힌 채 백지 상태로 남겨졌다.전자책과 함께 발간되는 종이책의 판매 수익금은 모두 윤 부장판사 치료비로 사용될 예정이다. 책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은 천고법치문화재단이 지원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