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서까지 나왔지만…중대재해 처벌기준·책임 소재 여전히 '안갯속'

CSO가 안전조직·인력·예산에 관한 최종 결정권자여야
CEO 책임 면해…기업들 "면책요건, 경영 현실과 큰 괴리"

'적정 예산' 얼마냐엔 '합리적 수준만큼'…불명확성 더 키워
안전 관리자와 전담조직 구별도…사실상 기업에 이중부담
< 중대재해 예방 산업안전포럼 >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17일 열린 제1차 중대재해 예방 산업안전포럼에서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대재해처벌법의 산업재해 분야 소관부처인 고용노동부가 내년 1월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지난 8월 가이드북에 이어 17일 ‘해설서’를 내놨다. 하지만 경영책임자의 범위 등 핵심 쟁점이 여전히 불명확해 법 시행 이후 산업현장에 일대 혼란이 우려된다. 특히 정부는 안전담당 임원을 선임했다고 하더라도 ‘경영책임자’가 면책되진 않는다면서도 경영책임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명확히 적시하지 않았다.

해설서 나와도 여전히 모호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경영책임자는 사업장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지며, 이를 위해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만약 이를 소홀히 해 산재가 발생할 경우 경영책임자를 처벌한다는 게 이 법의 골자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은 제정 당시부터 ‘졸속 입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고용부는 8월 120쪽짜리 ‘가이드북’을 배포해 사업주의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의무’를 제시했지만 경영계의 우려를 전혀 씻어내지 못했다.
이번 해설서는 총 233쪽에 달한다. 중대재해처벌 대상자인 ‘경영책임자’의 의미,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 관련 아홉 가지 의무의 구체적 이행 방안 등을 쉽게 알려주기 위한 자료라는 게 고용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경영계의 기대와 달리 해설서는 여전히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모호한 내용을 예전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며 “법을 적용받을 사람들이 겪을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우선 기업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경영책임자’와 관련한 고용부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다. 최고경영자(CEO)가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우선 최고안전책임자(CSO)가 안전 분야 조직, 인력, 예산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또 법령이 정하는 모든 요건에 맞게 체계를 갖추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기업계 관계자들은 “CSO가 안전 분야에선 CEO를 제치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는데 경영 현실을 비춰보면 불가능하다”고 한결같이 지적했다. 결국 CEO에게 포괄적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정부의 뜻이라고 경영계는 보고 있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해설서는 안전보건책임자가 있더라도 대표이사가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인다”며 “둘 다 책임을 진다면 ‘또는’으로 규정한 법 문언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결국 기업별로 알아서 하라는 얘기”

중대재해법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불명확성이 해설서로 되레 가중됐다는 지적이다.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투입해야 하는 ‘적정한 예산’의 수준에 대해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수준만큼’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개별 기업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해설서가 법에 근거가 없는 자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가령 법령에서는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의 일환으로 ‘안전 경영 방침을 세우라’고 정하고 있을 뿐인데, 해설서에서는 ‘구체적인 대책과 세부적인 로드맵을 만들라’는 식으로 과도한 의무를 부과한다. 또 해설서는 ‘안전관리 전담조직’과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관리자’를 구별하도록 하고 있는데, 사실상 기업에 이중부담을 지우는 격이라는 지적이다. 김동욱 변호사는 “법령 어디에도 사업장의 안전보건조직이 안전보건 전담조직을 겸할 수 없다는 근거가 없다”며 “법 위반 시 형사처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산업안전보건본부 관계자는 “어느 수준으로 준비해야 하는지는 기업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라며 정부 인증제 마련 요구와 관련해선 “획일적으로 정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일각에서는 법 시행 이후 이른바 ‘원님재판’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대형로펌 형사 전문 변호사는 “법을 위반하면 형사처벌이 되는데, 스스로 알아서 잘 지키라는 건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의미”라며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영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부실 입법이라 해설서로 논란을 정리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고용부가 해설서에서 ‘경영책임자’의 판단 기준을 밝혔다고 하지만, 해설서 발간 직후 기업들은 그와 관련한 질문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고 전했다.

곽용희/백승현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