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선수·상금왕…'피날레의 여왕' 고진영, 다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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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LPGA 최종전 우승… 대회 2연패22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의 티뷰론GC(파72·6556야드) 18번홀(파4). 버디 퍼트가 홀 10㎝ 옆에 붙었다. 그제서야 고진영(26)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한숨을 쉰 뒤 환하게 웃었다. 막판 질주로 올 시즌 대역전극을 완성하면서 올해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손목통증에도 생애 첫 9언더파
상금왕 3연패·올해의선수 2회
한국 골프 선수 첫 쾌거
다승·CME 글로브포인트도 1위
"끝까지 포기 안하니 우승 선물"
'타이틀 경쟁' 코다에 대역전
세계랭킹 1위 탈환도 유력
그는 이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총상금 500만달러) 최종 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 9개를 몰아치며 최종 합계 23언더파 265타로 우승했다. 9언더파 63타로 자신의 최다 언더파 기록을 새로 쓴 그는 우승상금 150만달러(약 17억8500만원)를 품에 안았다.
한국인 첫 상금왕 3연패 등 달성
이날 우승으로 고진영은 올해의 선수, 상금왕, 다승왕에 레이스 투 더 CME 글로브 스코어 1위까지 싹쓸이했다. 이번 대회 직전까지 넬리 코다(23·미국)를 근소한 차이로 추격하던 그가 대역전극을 이룬 것이다.한국 골프 역사도 새로 썼다. 한국인이 올해의 선수를 두 번 수상한 것은 고진영이 처음이다. 올해 누적 상금 350만2161달러(약 41억5687만원)로 이룬 상금왕 3연패도 한국 선수로는 첫 기록. 2006~2008년 상금왕 로레나 오초아(멕시코) 이후 13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다.이번 대회는 고진영과 코다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로 시작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대회 첫날 고진영이 공동 25위에 그치며 주춤하는 듯했지만 2라운드부터 공동 9위, 3라운드 공동선두로 빠르게 따라잡았다. 최종 라운드는 고진영과 코다, 하타오카 나사(19·일본), 셀린 부티에(28·프랑스)까지 4명이 공동선두로 시작했다. 시작부터 버디를 몰아친 고진영의 압도적 플레이로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그는 1라운드 10번홀부터 4라운드 18번홀까지 63홀 내내 단 한 번도 그린을 놓치지 않았다. 2라운드부터 그린적중률 100%를 지킨 날카로운 아이언샷에 완벽한 퍼팅으로 ‘진영 고 쇼’를 완성했다.
지난 5월부터 괴롭혀온 손목 부상도 그를 흔들진 못했다. 고진영은 “1라운드 9번홀에서 손목이 너무 아파 티샷 후 울면서 이동했다”며 “캐디가 ‘길게 보면 이 대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기권해도 괜찮다’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우승을 향한 그의 집념이 더 강했다. 고진영은 이날 1번홀(파5)에서 가장 먼저 버디를 낚아 선두로 나선 뒤 전반에만 6개의 버디를 기록했다. 하타오카가 2타 차까지 쫓아왔지만 고진영은 3타를 더 줄이며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코다는 이날 3타를 줄이는 데 그쳐 일찌감치 우승 경쟁에서 밀려났다.
노력으로 빚어낸 ‘막판 스퍼트’
올 시즌 초, 고진영은 극도로 침체된 상태였다. ‘우승을 한 번이라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정도다. 특히 지난 3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당시 상태를 ‘골프 사춘기’라고 표현한 그는 골프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커트 탈락을 경험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하지만 7월 발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 클래식에서 시즌 첫 승을 올리며 반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코다에게 금메달을 내준 그는 국내에서 절치부심하며 집중적 훈련에 들어갔다. 스윙 코치와 클럽, 퍼터 등 모든 것을 바꾸고 주니어 때처럼 연습했다. 고진영은 “올림픽 이후 한 달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연습했다”고 털어놨다. 골프 전문가들이 고진영의 가장 큰 천재성을 ‘노력’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고진영은 다시 한번 ‘송곳 아이언’을 들고 돌아왔다. 9월 포틀랜드 클래식을 시작으로 10월 코그니전트 파운더스컵,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시즌 4승과 한국 선수 LPGA투어 통산 200승의 주인공이 됐다. 시즌 최종전까지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내면서 ‘막판 스퍼트의 여왕’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우승 뒤 인터뷰에서 “감정 기복이 큰 한 해였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늘이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니 우승이라는 선물을 주겠다’고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진영은 “슬플 때는 많이 울었고 골프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그 상황에 맞춰 후회 없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했다. 23일 귀국하는 고진영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는 “골프채를 멀리 두고 골프 생각은 잠시 접고 싶다. 배 위에 감자튀김을 올려놓고 넷플릭스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