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피하려 '재직조건' 넣었지만…법원 "노조 동의 필수"

상여금이나 각종 수당이 통상임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업규칙에 특정 조건을 넣는 등 변경하려면 과반수 노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8민사부(재판장 이기선)는 H사 소속 근로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청구한 임금 소송에서 지난 9월 2일 이같이 판단하고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근로자들은 매월 5만원씩 지급되는 개인연금보조금, 매일 6000원씩 지급되는 현물급식대, 교통비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며 이를 포함시켜 통상임금과 각종 수당도 다시 계산해 부족분을 지급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회사는 2015년 노사합의를 통해 개인연금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지급월 15일 이상 근무자에게만 지급된다"는 재직 조건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식대 지급기준에서도 2019년 노사합의를 통해 "해당 월 5일 미만 근무자는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재직 조건을 담았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통상임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이란 요건을 제시한 바 있다. 만약 상여금 지급 시점에 '재직'하고 있어야 하는 '재직 조건'이 있다면, '고정성'이 없기 때문에 통상임금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한 바 있다.이에 따라 많은 대기업들이 상여금이나 각종 지급금에 '재직 조건'을 붙여 통상임금에 포함되는 것을 막는 장치로 사용해 왔다. 이 사건에서 회사 측도 "노사가 각종 수당에 재직조건을 붙인 것은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 위한 것"이라며 "합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식대 등의 지급기준은 취업규칙이며, 여기에 재직 조건을 붙이는 것은 근로자들에게 불이익한 변경"이라고 판단했다. 현행 근로기준법 상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려면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조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재판부는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사측이 지급기준 개정에 대해 노조의 동의를 받은 증거가 없다"며 "별도로 과반수 동의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급기준을 개정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 개정 사실을 공지하고 부서 단위로 동의서를 취합했을 뿐, 지급기준의 배경이나 법적 의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주거나 근로자들의 의견 교환 기회를 보장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