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여행이란 시 쓰는 과정과 비슷"

11월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 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 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詩句)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계면쩍기만 한데
* 최갑수 : 1973년 경남 김해 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1997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단 한 번의 사랑』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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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시인은 늘 길 위에 있습니다. 아니면 낯선 오지마을에 가 있지요.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고요. 이른바 ‘길 위의 시인’, ‘여행하는 시인’입니다. 그가 여행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여행 작가로 길 위를 오간 지 벌써 15년째, 그동안 펴낸 여행책만 16권이 넘습니다.

“멈춰 서서 셔터 누른 모든 곳이 시”

시인이 된 것도 여행 덕분이었죠. 국문과 재학생 시절, 어느 날 그는 남해의 허름한 여관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을 보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시에 빠져들었습니다. 창문 틈으로 밀물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그곳에서 본 풍경, 장만옥이 복숭아 꽃잎 아래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며 사랑을 기다리는 장면은 마치 밀물이 드는 소리처럼 아득했지요. “그와 혼인했을 줄 알았는데 왜 하지 않았소?”
“날 사랑한다고 말을 안 했어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있소.”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그는 이 영화를 보고 이틀 동안 그 여관방에서 ‘밀물 여인숙’이라는 연작시 3편을 썼고, 얼마 뒤 그 시로 등단했습니다. 대학 4학년 때였지요. 졸업 후 여러 매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여행 담당’이 됐습니다.

그는 “여행이라는 게 시를 쓰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다”고 얘기합니다. 자연을 보는 태도나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닮았다는 말이죠. 사진 찍는 것도 시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둘 다 찰나를 담아야 하니까요. 그는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셔터를 눌렀던 모든 곳이 시였다”며 “길 위에서 나도 모르는 새 시를 쓰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나도 아프다. 안 그런 척할 뿐…”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위로!” 최고의 위로는 ‘나와 똑같이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과거에는 ‘괜찮아, 잘 될 거야’라며 독자를 위로했지만 지금은 ‘나도 아프다. 나도 외롭고, 힘들다. 안 그런 척할 뿐이지’라며 서로를 어루만진다고 하죠.

그런 그가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였습니다. 여행을 못 가니 일이 없고, 일이 없으니 통장 잔액이 말랐습니다. 스스로 ‘생계형 작가’라고 말하는 그에게 요즘은 살기 버거운 시절입니다. 그래서 올가을은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는군요.

그의 시 ‘11월’에 나오듯이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 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마는 것 같습니다.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그 햇빛들의 등 뒤에서 그는 ‘그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그 성찰의 시간을 지나 현실로 다시 돌아와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하늘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담담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그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계면쩍기만 한’ 단풍잎 한 장을 만나듯이,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시집을 펼치듯이, 우리 마음의 갈피를 들추며 위로의 말을 건네듯이 그는 스스로의 시간을 어루만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 외롭고 쓸쓸한 계절을 견디면서 그는 날마다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4시부터 6시30분까지 글을 쓰고 아침 먹기 전에 1만 보씩 걷습니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2006년부터 몸에 밴 습관이지요. 이 꾸준하고 성실한 자세가 그를 ‘위로하는 여행자 시인’으로 성장시킨 기둥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