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종의 물, 100가지 맛…국내 1호 워터소믈리에 고재윤 교수가 말하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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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경희대 호텔관광대학의 소믈리에실습실. 한 중년 남성이 밑이 넓적한 유리병(디캔터)을 아기 달래듯 흔들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기울인다. 그러자 가느다란 물줄기가 수정처럼 반짝이며 유리잔을 채운다. “와인처럼 물도 산소와의 접촉을 늘려주는 과정을 거쳐야 그 참맛을 알 수 있습니다.” 국내 1호 워터소믈리에인 고재윤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회장(사진)의 얘기다. 경희대 호텔관광대 명예교수이기도 한 그는 2011년부터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를 통해 500여 명의 워터소믈리에를 키워낸 한국 소믈리에계의 ‘대부’로 꼽힌다.
성분 따라 물맛 천차만별
와인처럼 디캔팅해야 참맛
영상 12도에서 마셔야 최적
고 회장이 물맛의 진가를 알게 된 건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와인 품평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그는 한 미쉐린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수십 개 생수를 소개하는 메뉴판을 손에 쥐게 됐다. 용천수, 해양심층수, 빙하수, 빗물, 염지하수 등 수원지에 따라 물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물을 물로 봐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26개국을 돌아다니며 150종류의 생수를 마셨다. 고 회장은 “프랑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선 고객들의 입맛과 건강 상태에 따라 맞춤형 물을 제공하는 ‘워터바’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국내 1호 워터소믈리에가 말하는 물맛이란 무엇일까. 와인은 색상, 향기, 촉감, 맛 등을 복합적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 반면 물은 투명하고 향기가 거의 없다. 혀에 정신을 집중해 촉감과 맛을 감별하는 게 그만큼 더 중요하다. 칼슘, 칼륨, 규산이 많은 물은 단맛과 청량감이 느껴진다. 약산성이면 신맛이, 약알칼리성이면 단맛이 난다. 마그네슘과 탄산염이 많은 물은 쓴맛, 나트륨이 많은 물은 짠맛이다. 철분이 많으면 혀가 알알한 느낌이 난다. 미네랄이 많은 물은 비린내가 나는 경우도 있다.
와인잔이 따로 있듯 물맛을 살릴 수 있는 잔도 따로 있다. 유리 두께는 얇은 게 좋다. 물의 질감에 혀의 감각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잔의 지름은 6~7㎝ 내외가 좋다. 잔의 크기에 따라 물이 혀에 처음 닿는 면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잔이 너무 작으면 혀 앞쪽 부분의 감각에 의존하게 돼 물맛을 입체적으로 느끼기 어렵다. 고 회장은 “물 온도는 제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영상 12도 정도가 최적”이라며 “물속 탄산이 지나치게 쏘는 느낌 없이 청량감을 만끽할 수 있는 온도”라고 설명했다.워터소믈리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좋은 물의 기준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수원지의 청정도다. 고 회장이 특별히 선호하는 수원지는 깨끗한 빙하수를 공급하기로 유명한 슬로베니아다. 칼슘, 마그네슘, 산소 등을 많이 함유하고 약알칼리성을 띠는 물도 평가가 좋다.
워터소믈리에는 와인처럼 요리 맛을 살려주는 ‘마리아주(궁합)’를 고객들에게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통상 탄산 함량 정도에 따라 요리별로 다른 물을 추천하는 편이다.
마시는 물은 탄산 함량에 따라 스틸워터, 에퍼베센트워터, 라이트워터, 클래식워터, 볼드워터로 나뉜다. 전채 요리를 먹을 때는 탄산이 많아 ‘샴페인’ 역할을 하는 볼드워터가 잘 어울린다. 기포가 입맛을 돋우면서 비린내를 잡아준다. 해산물은 약간의 탄산이 있어 기포가 가벼운 라이트워터와 합이 잘 맞는다. 해양심층수가 대표적이다. 탄산이 없는 스틸워터는 비린 맛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어 금물이다. 국내에서 보편적으로 즐겨 먹는 생수가 스틸워터다. 소고기는 탄산 함량이 중간 정도인 클래식워터가, 채소류는 탄산이 살짝 느껴지는 에퍼베센트워터가 좋다.고 회장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람마다 식음료의 기호와 입맛이 다르다는 걸 존중하는 것”이라며 “물과 음식의 짝을 맞춰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조합을 기억해 두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글=이주현/정지은 기자
사진=신경훈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