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면역학 강의] 면역 관용, 후천성 면역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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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승우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영화 <피아니스트>는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삶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주인공인 폴란드인 피아니스트가 독일군 장교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참담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감정과 영혼을 공유하는 찰나의 순간은 예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위대함일 것이다.
모차르트를 연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도 천의무봉의 연주를 위해 그토록 인생의 고난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대 때부터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그에게 갑 자기 찾아온 병인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은 중추신경 세포를 코팅하는 단백질을 우리 면역체계가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autoimmune disease)이다.신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환자들은 육체적·정신적·심리적인 이상 증상에 노출된다. 하스킬은 가까스로 병에서 회복했지만 후유증으로 20대에 허리가 굽은 노파처럼 보였다고 한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던 영국의 천재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도 다발성 경화증으로 고통받았는데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비운의 첼리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자가면역질환이 음악가들을 특별히 괴롭힌 질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성들에게 유독 더 많이 발병하는 건 사실이다.자기를 향한 면역반응
지난 두 번의 연재를 통해 후천성 면역의 핵심으로 다음 두 가지를 얘기했다. 먼저 무작위적인 면역 수용체-B세포의 항체와 T세포 수용체(TCR)–의 재조합으로 발생한 개별적인 수용체를 가진 클론들의 집합으로 구성된 후천성 면역세포 집단의 특성이다.
또한 그럼으로써 최대한의 항원 반응성을 가진 수용체 레퍼토리(repertoire)를 보유하고 이후 항원 에 의해 클론이 선택되는 기대적 반응체계를 이야기했다.
후천성 면역은 선천성 면역 수용체처럼 반응해야 할 물질이 있는 채 만들어지지 않고, 우주 밖 미지의 물질에도 반응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순진한(naive) 후천성 면역 수용체들은 애초에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해서 작동할 요량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하스킬과 뒤프레를 괴롭혔던 신경세포 단백질에 반응하는 항체들도 그저 자기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즉 자신의 수용체에 잘 들어맞는 항원에 가서 결합함으로써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건 항체 본연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무작위적으로 탄생한 후천성 면역이 ‘왜 자기에게 작동하지 않을까’가 오히려 더 합당한 질문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혈액을 돌아다니는 후천성 면역세포 중 상당수는 자신의 항원에 반응할 수 있음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는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서 혈소판을 자극해 희귀한 혈전 형성을 촉진할 수 있는 자가 항체 (autoimmune antibody)가 발생했던 이유와 궤를 같이한다.그러나 한편으론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가 항체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것임도 확신할 수 있다. 바로 ‘후천성 면역 관용(acquired immune tolerance)’이라는 반응 때문이다.
면역 관용의 이론과 실증
면역 관용을 얘기하면 면역학자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피터 메더워(Peter B. Medawar)와 클론 선택 이론의 완성자인 호주의 프랭크 버넷(Frank M. Burnet)이 그 주인공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면역학자인 이 두 분은 면역세포가 온전히 밝혀지기도 전에 인간에게 면역반응을 억제할 수 있는 후천적 면역 관용 반응이 획득될 수 있음을 밝혀 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두 사람이 활약하던 당시는 종이 논문이 출간돼야 비로소 타인의 연구를 헤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버넷 박사는 특유의 논리적 이론 완성으로, 메더워 박사는 끈기 있는 실험을 통한 실증으로 면역 관용의 역사적 페이지를 열었다.
메더워 박사는 뛰어난 학자이자 연구자로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을 소개한다. “무릇 과학자들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지만 때론 회의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이어야 하지만 비판적이어야 한다. 직관에 의존하는 자유로움과 또한 정교하게 설계된 사고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과학에는 시와 같은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도서목록 정리 같은 일도 중요하다(there is a poetry in science, but also a lot of bookkeeping).”
뛰어난 과학자들은 예외 없이 평범한 현상으로부터 의외의 면을 통찰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이를 메더워 박사는 시와 같다고 표현한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과학의 영역에서 직관과 통찰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반복하고 인내심을 갖고 결과들을 정리하면서 증거를 모아가는 노력이 없다면 가설은 증명되지 않은 채로 사장될 수밖에 없다.
메더워 박사는 이를 도서목록 정리와 같은 일이라고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를 꿈꾸는 대학원생들에게 이 문장을 얘기하곤 한다.
노벨상위원회가 정리한 메더워 박사의 업적을 소개한다. “우리 면역체계는 미생물과 외부 조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면역의 일부는 유전적인 기원이지만, 일부는 후천적으로 얻어지고 태아에게는 없는 경우도 있다.
즉 자기 조직을 남의 조직과 면역학적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태아 시기에 획득되는 성질인데, 이를 개념적으로 확립한 사람이 프랭크 버넷이라면, 피터 메더워는 이를 조직 이식 실험을 통해 1951년 증명했다.
메더워 박사는 태아 때 이식된 조직은 남의 조직이라도 거부되지 않고 면역 관용을 얻게 되고, 성체가 돼 같은 조직에 계속 관용을 얻는다는 사실을 보였다. 메더워 박사는 면역학적 실증을 통해 장기 이식의 새로운 길을 확립했다.”
메더워 박사가 실험했던 1950년대는 이제 막 항체가 연구되던 시기였고, 하물며 면역 관용에 가장 중요한 T세포는 존재조차도 불분명 했다. 따라서 메더워 박사의 연구는 조직 이식에서 일어나는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한 실용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처음엔 화상 환자의 피부 이식 경험을 통해 조직 이식에 면역이 작동한다고 생각했고, 이후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행한 토끼와 생쥐의 피부 이식 실험을 통해 조직거부반응에 대한 면역학적 실체를 증명했다.
이런 조직거부반응을 유도하는 유전적 형질은 무엇인가. 지난 강의에서 얘기한 주요조직 적합성 분자(MHC·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가 주인공이다. T세포는 MHC에 올라온 항원 펩타이드(pMHC)를 인식해서 반응한다고 했다. 자기 조직의 MHC는-감염으로 인해 외부 항원이 제시되는 일이 없다면 대부분 자기의 단백질 항원을 올린다.
이 경우 자기 T세포는 반응하지 않는데 바로 면역 관용 때문이다.
한편, 남에게서 온 이식 조직은 MHC 유전형이 다르다(이를 allo-MHC라고 부른다). 자기 T세포는 이식된 조직의 allo-MHC·펩타이드에 격렬하게 반응해 염증반응을 유도하고, 결국 조직은 거부된다. 이식된 조직은 좋은 목적으로 환자의 몸에 이식된 것이지만, 면역학적으로는 명백한 비자기이므로 T세포가 반응해서 제거하는 것은 본연의 임무다.
메더워 박사의 연구 이래로 이식된 비자기 pMHC에 대한 자기 T세포의 반응(영어로 alloreactive T cell response)은 가장 분명한 면역반응 중 하나지만 자세한 기전은 지금도 확실치 않다. 인간의 MHC인 HLA 분자의 높은 다형성(polymorphism) 때문으로, 개인마다 다른 HLA 분자와 TCR 레퍼토리를 정교하게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직 이식이라는 의학적 필요로 면역 관용이라는 현상이 알려졌으나 실제로 면역 관용은 후천적 면역체계를 지탱하는 핵심으로 관용의 대상은 실로 광범위하다.
장기 이식은 인간에 의해 도입된 시술로 자연적으로 일어날 일은 없다. 프랭크 버넷 박사는 1949년 ‘면역계는 어린 시절 인체가 무엇으로 구성됐는지를 배운 다음 이를 토대로 비자기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라는 자기 분자 가설(selfmarker hypothesis)을 주장한다.
이후 메더워 박사의 실험으로 가설이 증명돼 노벨상을 수상했다. 버넷 박사는 이후 클론 선택 이론을 정립하고 나아가 인체의 면역체계는 자신의 세포와 조직에 반응하지 않도록 훈련된다는 광범위한 면역 관용 가설을 주장했다.
마치 신화처럼 각인된 ‘면역이란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해서 작동한다’의 개념적 토대를 버넷 박사는 깊은 사유를 통한 통찰로 주장한 것이다. 참 경이로운 분이다.면역 관용의 실체
지금은 메더워 박사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조직거부반응의 주요 분자들과 버넷 박사가 주장한 자기·비자기 구분의 세포 생물학적 반응을 알고 있다.
척추동물의 후천성 면역의 놀라운 반응성은 면역 수용체 레퍼토리의 광범위함에 기인한다. 하지만 반응할 대상을 규정하지 않고 만들어내는 수용체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자기에게 반응성이 있는 수용체를 생산한다.
이들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먼저 자기 반응성이 높은 수용체를 가진 후천성 면역세포들을 발달 과정에서 찾아내서 제거하는 것이다. 직관적이고 간단한 방법이다.
다만 이 방법이 작동하기 위해선 수용체의 자기 반응성을 점검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골수에서 탄생한 B세포들은 항체가 만들어진 이후 주변을 둘러싼 무수한 자기 단백질들에 노출된다. 골수의 이웃 세포들의 막에 있거나 분비되어 액체 상태로 있는 단백질들은 그야말로 무해한 자기 단백질이다.
항체는 이런 자기 단백질들에 반응하는지 검증되고, 반응성이 강한 항체를 가진 B세포의 운명은 여기까지, 태어나자 곧 죽음을 맞는다. 세포 사멸(apoptosis) 과정이다. 반응성이 없는 B세포들은 혈류를 통해 세상(림프절과 같은 이차 림프 기관)으로 나갈 수 있다.
T세포의 경우도 비슷하다. 다만 T세포는 항원을 MHC와 함께 인식하므로 MHC를 다량으로 가진 특별한 세포들이 필요하다. 이들 이 흉선상피세포(TEC·Thymic Epithelial Cell)로 흉선이라는 기관이 T세포 발달에 필요한 이유다.
T세포에서 TCR이 무작위로 만들어지면 TEC의 MHC에 올려진 자가 펩타이드 항원에 대한 반응성이 검증된다. TEC가 제공하는 pMHC에 반응성이 없는 T세포는 MHC에 올라온 비자기 항원도 못 볼 확률이 높으므로 쓸모없는 T세포로 인식돼 사멸된다.
TEC pMHC에 반응성이 있는 T세포만 살아남으므로 이 과정을 T세포 발달의 양성 선택(positive selection)이라 부른다.
생존한 T세포는 흉선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또 한 번 TEC 혹은 항원제시세포(APC)의 pMHC에 대한 반응성이 검증된다. 마찬가지로 자가 펩타이드 항원에 대한 반응이다.
이번엔 반응성이 매우 큰 T세포들을 사멸시키는데, 이는 자가 항원에 강하게 반응할 수 있는 위험한 T세포들을 미리 솎아내는 것으로 T세포 발달의 ‘음성 선택(negative selection)’이라 부른다.이 험난한 과정을 다 통과해야 T세포는 비로소 세상으로 나간다. T세포의 발달 과정은 매우 복잡한 작업으로, 모든 내용을 자세히 지면에서 설명할 수 없고 다소 축약된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처럼 후천성 면역세포의 발달 과정에서 일차 면역조직인 골수와 흉선에서 자가 반응성이 높은 세포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중심 관용(central tolerance)’이라고 부른다.
후천성 면역세포들은 혹독한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죽음을 맞는다. 발달하는 T세포의 경우 약 2%의 세포만 살아남는다고 하니 흉선을 죽어가는 미성숙 T세포들의 시체들로 가득한 무덤으로 비유한 것이 이해된다.
그럼에도 우리 몸에는 자가 반응성이 있는 T세포들이 존재한다. T세포는 결국 TEC가 제공하는 자가 항원이 올려진 MHC를 보고 성숙한다. 즉 모든 T세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가 항원 반응성이 있다.
음성 선택으로 위험한 세포들을 걸러낸다고는 했지만, 자가 반응성이 있는 T세포들을 어느 선부터 위험 세포로 정할 것인가. 자가 반응성이 높아 세포를 사멸시키는 음성 선택의 기준점 혹은 한계점(threshold)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선이 너무 높다면 사멸되는 T세포는 줄일 수 있겠지만-TCR 레퍼토리의 확대자가 반응성이 상당히 높은 세포들을 풀어놓을 수 있다. 반대로 이 선이 너무 낮다면 살아남는 T세포들의 수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니-TCR 레파토리의 감소-우주 밖 물질에도 반응해야 하는 T세포의 사명을 담보할 수 없다.
어느 선에서 절충은 있겠지만, T세포 클론의 다양성을 확보한 채 자가 반응성을 피하는 사이엔 반직관적인 모호함이 존재한다.
자가 반응성이 있는 후천성 면역세포에 대처하는 다른 방안은 자가 항원을 봤을 때 웬만하면 활성을 나타내지 않도록 길들이는 방법이다. 주로 이차 면역 조직을 포함한 말초 조직에서 보이므로 이를 ‘말초 관용(peripheral tolerance)’이라 칭한다. 말초 관용의 대상은 자가 항원 외에도 우리에게 무해한 항원(예를 들어 음식으로 섭취한 단백질)까지 포함된다.
중심 관용보다 훨씬 광범위한 항원을 대상으로 다양한 환경적인 상황을 고려해 면역 활성이 아니라 관용(즉 면역반응 억제)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내용은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클라라 하스킬과 재클린 뒤 프레를 괴롭힌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은 그 원인을 알 순 없지만, 면역 관용을 관장하는 회로(circuit) 중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다행히 하스킬의 면역체계는 다시 관용(타협)하는 방법을 찾았으나 뒤프레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면역억제제나 자가 항체를 분비하는 B세포를 표적하는 항체 신약들(오크렐리주맙·알렘투주맙)이 뒤 프레의 병마를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 소개>
이승우
바이러스면역학을 전공하고 포스텍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샌디에이고 라호야면역학 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2012년부터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포면역학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기초연구로는 점막기관 염증 및 감염 면역을, 응용연구로는 항암면역치료를 연구 중이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