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터 제주까지…'일단 넣고 보는' 무지성 청약 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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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지성 투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직장인 유모씨(38)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동산 투자 관련 단체 대화방부터 열어본다. 투자할 만한 상품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대화방 내 사람들 사이 오가는 대화를 조금 살펴보다가 '청약에 넣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단지가 어디에 들어서는지, 어떤 단지인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당첨된 후 웃돈(프리미엄)이 얼마나 붙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무지성(無知性)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非)아파트 틈새상품에 투자자 몰려
장기 민간임대아파트, 오피스텔, 생활형 숙박시설 등 비(非)아파트 상품이 전국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정부의 아파트 규제를 피해 다주택자는 물론 1주택자, 무주택자들까지 틈새 상품 투자에 열을 올린다. 문제는 이들 단지에 대한 정보도 없이 '묻지마' 식으로 뛰어드는 이른바 무지성 청약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제주까지…쏟아지는 틈새 상품
7일 분양업계에 따르면 현대엔지니어링이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일원에 공급하는 생활형 숙박시설 '힐스테이트 창원 센트럴'은 총 296실 모집에 6만6446명이 몰리면서 평균 224.4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전용 88㎡는 231.2대 1(148실 모집에 3만4228명), 전용 102㎡는 217.6대 1(148실 모집에 3만2218명)이 나왔다. 생활형 숙박시설인 '롯데캐슬 마곡 르웨스트'도 지난 8월 진행된 청약에서 876실 모집에 57만5950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 657.4대 1을 기록했다.오피스텔 투자에도 많은 투자자가 몰렸다. 지난달 2일 청약을 받은 힐스테이트 과천청사역에는 89실 공급에 12만4426명이 몰렸다. 평균 경쟁률은 1398.0대 1, 일부 유형은 5761.0대 1이 나왔다. 분양가가 최고 22억원에 달했고, 청약하기 위해서는 1000만원이 필요했음에도 수많은 투자자가 쏠렸다.서울에 공급된 오피스텔 '신길AK 푸르지오' 청약도 흥행했다. 96실 모집에 총 12만5919명이 접수했고 평균 경쟁률은 1311.6대 1을, 83실 모집이 이뤄진 한 면적대에는 11만1963명이 몰려 1348.9대 1의 경쟁률이 나왔다. 이 오피스텔에 청약을 넣기 위해 신청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사태도 벌어졌다.장기민간임대주택도 수요자들의 관심이 많다. 제주 애월읍에 공급되는 '제주 애월 남해오네뜨' 전용 84㎡A 당해지역 경쟁률은 117.0대 1, 기타지역은 2464.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서울에서 공급되는 현장 분위기도 벌써부터 뜨겁다. 롯데건설은 도봉구 방학동 일원에 '도봉 롯데캐슬 골든파크'를 공급할 예정인데, 온라인 '떴다방' 등에서는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
"일단 넣고본다"…"그런데 내가 어디에 넣었지?"
틈새 상품이 주목받게 된 것은 아파트보다 규제가 느슨해서다.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청약할 수 있다. 특히 오피스텔의 경우 100실 미만이면 서울 등 규제 지역에서도 전매 제한이 없다. 바로 웃돈을 붙여 팔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단지에 대해 무지성으로 도전하는 투자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재당첨 제한 등도 없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너도나도 청약을 넣고 있다.한 분양업계 관계자는 "다주택자는 물론 1주택자, 심지어는 무주택자들도 청약에 넣는다"며 "청약통장 소진, 재당첨 제한 등 위험 요인도 없으니 더 과열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최근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커졌다는 박모씨(39)는 "처음에는 투자정보가 뜨면 입주자모집공고도 살펴보고 지도 앱으로 위치도 살피곤 했는데 최근에는 규제가 없다는 곳이 나오면 일단 넣어보고 있다"며 "먼저 당첨이 돼야 뭐든 할 수 있는데, 대화방에서 얘기하는 '선당후곰'(일단 먼저 당첨되고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는 뜻)이라는 말이 딱 맞더라"고 했다.
초보 투자자인 김모씨(32)도 "온라인 대화방에서 추천을 해주는 상품이면 일단 넣어보는 편"이라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대화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청약에 넣으니까 따라서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집값 상승에 대한 불안감과 단기에 수익을 올리고 싶다는 기대감이 이런 '묻지마 투자' 행태를 조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인만 부동산연구소 소장은 "안 사면 오를 것 같고 돈은 벌고 싶다는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주거 안정을 해결한 유주택자들은 단기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 뛰어들고 있고, 집을 보유하지 못한 무주택자들은 아파트는 진입장벽이 높아 접근하기 어렵다보니 비아파트 투자에 나서는 것"이라고 했다.그러면서 "부동산이라는 투자대상은 공공재와 민간재의 성격이 섞여있다보니 투자와 투기가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리게 된다"며 "투자 행위 자체가 잘못됐다고 할 수 없지만 무조건 청약을 넣는 것은 투기에 가깝기 때문에 지양하는 것이 맞다"고 지적했다.
자금이 오랜 기간 묶일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고준석 동국대 겸임교수는 "부동산 시장에 능숙한 투자자건, 이제 막 시장에 진입한 초보 투자자건 '무지성'으로 청약을 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부동산 시장 하락기에는 수년간 자금이 물릴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