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까지 막으면 어쩌라는 거냐"…벼랑 끝 내몰린 저신용자들

'생계형 자금' 취약계층, 제도권 금융사로부터 대출 외면

폭발적인 가계대출 증가 불구…'저신용' 연평균 3.7% 감소
내년 대출 환경 더욱 악화…정책서민금융 확대 필요성 대두
서울 시내 한 새마을금고에 부착된 대출 안내문. 사진=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저신용자 서민들의 생계형 자금 수요가 증가했지만, 이들을 위한 제도권 금융사의 대출 공급 규모는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의 정책서민금융 역시 중·저신용자 대출 규모의 10% 수준에 그치면서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으로 나타났다. 최근 몇 년간 가계대출의 폭발적인 증가세가 이어진 가운데 취약계층은 생계자금마저 구하기 힘든 환경에 처했단 의미다.

1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6월까지 고신용자의 연평균 가계신용대출 증가율은 13.3%를 기록한 반면, 저신용자의 가계신용대출은 3.7% 감소했다. 고신용자를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빠르게 몸집을 불리는 동안, 정작 자금이 절실히 필요한 중·저신용자나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 공급은 말라갔던 셈이다. 소득 하위 20% 차주의 신용대출 중 생계형 자금용도 비중은 2019년 32.8%에서 2020년 43.8%까지 확대됐다.정부의 정책서민금융 공급 규모는 중·저신용자 전체 대출 수요에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의 '서민금융시장 현황과 활성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정책서민금융상품(9조6000억원)과 사잇돌 대출(2조원)을 합산한 총 공급 규모는 11조6000억원으로 집계됐다. 같은 해 중·저신용자 전체 가계신용대출 규모가 115조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책서민금융 공급 규모는 전체 대출 수요 대비 10% 수준에 그쳤다.

문제는 내년 취약계층의 대출 환경이 더욱 악화될 것이란 점이다.

금융당국은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치를 4~5%대로 설정한 상태다. 올해 목표치인 5~6%대보다 더 강화된 조치다. 차주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규제도 본격 시행된다. 총대출액 2억원이 넘는 차주는 은행권 DSR 40%, 제2금융권 DSR 50%를 적용받게 된다. 그간 유예돼왔던 카드론도 내년부터 차주별 DSR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내년 강화된 가계대출 규제가 적용되면 제도권 금융기관들은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 문을 더욱 굳게 잠글 수밖에 없다. 대출 가능 여력 자체가 낮아져 대출 공급 차주를 더욱더 까다롭게 골라야 하는데, 취약계층의 경우 리스크가 크고 수익성은 낮은 만큼 유입 필요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로 현재 금융당국이 내년 가계대출 총량 규제에서 중·저신용자 대출을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나,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 공급 확대 방안으로 실효성이 낮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은행권의 경우 중금리 대출의 금리 상한선이 6.5%로 고정됐다. 때문에 중·저신용자 대출 공급 규모 자체를 대폭 늘리긴 쉽지 않은 상태다. 기준금리 인상 시기에 들어선 만큼 위험 대비 수익성이 하락할 가능성이 커서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상호금융,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한도성 미사용 여신 충당금 적립 규제, 저신용 차주의 리스크 관리 비용 등 중·저신용자 대출 규모를 확대하는 데 따른 부담이 있어서다.

2금융권의 경우 기준금리 인상과 법정 최고금리 인하에 따른 예대마진 축소 탓에 중·저신용자 대출 규모를 확대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 7월 법정 최고금리를 기존 연 24%에서 연 20%로 4%포인트 인하 조치한 바 있다. 이는 2금융권에서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 문턱을 크게 높인 요인으로 꼽힌다. 법정 최고금리를 낮추면, 그만큼 제도권 금융사들이 대출 공급량을 줄이고 심사를 강화하는 조치에 나설 수밖에 없어서다.
자료=하나금융경영연구소
이미 정부는 법정 최고금리 인하 결정 당시 저신용자가 제도권 금융사로부터 밀려나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하기도 했다. 금융당국은 최고금리 인하 조치로 기존 신용대출 이용자 약 31만명이 대출 만기가 도래하는 3~4년에 걸쳐 민간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추산했으며, 이중 약 3만9000명은 불법 사금융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고강도 가계대출 규제, 법정 최고금리 인하 등 정부의 대출 정책에 따라 생계형 자금 용도로 대출이 필요한 실수요자가 막대한 이자 부담을 입을 위험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현재 불법 사금융 업체가 차주들로부터 받는 평균 이자율은 연 50%에 달한 상태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미등록 불법 사금융 업체의 평균 이자율은 연 46.4%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이 취약계층에 대한 정책서민금융 확대와 취약계층 차주의 금융 접근성 향상을 유도할 대출 정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는 이유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현재 고강도의 가계대출 규제를 하는 근본 이유는 투기적 요소를 막겠다는 것인데, 그 영향이 생계유지를 위해 대출이 필요한 취약계층에 피해를 주고 있는 셈"이라며 "단순히 수치화된 가계대출 규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저신용자 대출 영역을 보호할만한 구체적인 대출 정책이 필요하다. 서민금융 강화 및 보완책이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리 인상기에 법정 최고금리까지 낮아진 상태인 만큼, 당국이 가계대출 규제에서 중·저신용자 대출을 일부 풀어준다 하더라도 저신용자에 대출이 충분히 공급될 여지는 낮다"며 "현시점에서 저신용자 대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정책서민금융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조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