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예술, 스타일이 되다···알폰스 무하[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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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곡선, 아름다운 실루엣, 섬세한 꽃 장식.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단숨에 시선을 빼앗기죠.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의 작품입니다. 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곧 하나의 스타일이 돼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습니다. 작가가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스타일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작품명은 'F. 샹프누아 인쇄소 포스터'입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포스터, 달력 등에 들어갔던 겁니다. 포스터와 달력이 사람들에게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무하는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허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힙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닫혀있는 응접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를 통해 아르누보 운동의 상징이 된 무하의 삶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무하는 체코 모라비아의 이반지체 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곳으로 주로 수공업이 발달했습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도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죠. 이런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훗날 무하의 작품에 녹아들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법원 안내원이었던 아버지의 소개로 법원 서기로 일하면서도, 이웃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등 틈틈이 작업을 했습니다. 20대가 되어선 오스트리아 빈에 가 무대 디자이너로도 일했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파리로 떠나며 이뤄졌습니다. 운 좋게 큐헨 벨라시 백작 가문의 후원을 받아 파리 유학까지 갈 수 있게 됐죠.
무하가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엔 문화·예술이 찬란하게 꽃 피는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해 다양한 개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고 밤새 예술과 인생에 대해 토론하던 시기였죠. 무하는 이런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으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긴 무명 생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30대가 돼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책과 잡지, 포스터 삽화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오기 마련이죠. 무하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처럼 그 기회로 인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1894년 무하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백작 가문의 지원도 모두 끊어져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다른 직원들은 전부 휴가를 간 사이 무하는 홀로 인쇄소에 나와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리 르네상스 극장의 매니저가 급히 인쇄소를 찾아왔습니다. 새해 첫날 공연될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를 그릴 삽화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이 공연의 주연을 맡았는데요. 베르나르는 그전에 만들어진 포스터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장 매니저가 급히 삽화가를 찾아 나섰지만 휴일이라 구하지 못하고 무작정 인쇄소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혼자 인쇄소에 있던 무하는 덜컥 이 포스터 작업을 맡게 됐습니다. 그는 당시 파리에 판을 치던 선정적인 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2m에 달하는 길이의 포스터에 신비롭고 우아한 여성의 모습을 담아냈죠. 극장 매니저는 낯선 그림에 당황해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달랐습니다. 무하의 그림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앞두고 파리는 무하의 포스터로 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시민들도 무하의 포스터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몰래 포스터를 뜯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날 정도로 뜨거운 열풍이 일었죠. 그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순수 예술에 비해 폄하됐던 상업 예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입니다. 상업 예술도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이후에도 베르나르는 자신의 공연과 관련된 많은 작업들을 무하에게 맡겼습니다. 포스터는 물론이고 무대 디자인, 의상, 장신구 등까지도 무하가 만들었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좋은 파트너 관계를 맺고 함께 성장했습니다. 오랜 시간 재능을 갈고닦아온 아티스트, 그리고 탁월한 안목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믿어주는 후원자의 만남. 정말 이상적인 조합인 것 같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무하는 큰 부와 명예를 얻게 됐습니다. 12개의 별자리와 여인을 함께 그려 넣은 '황도 12궁'은 실내용 달력에 그려진 그림인데요. 이 그림으로 인해 달력 주문이 폭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4명의 여성을 통해 계절을 의인화하고 그 변화를 담아낸 '사계'도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하는 1890~1910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아르누보는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데요. 정형화된 전통 예술에서 벗어나 차별화된 양식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탄생한 아르누보 양식은 섬세한 곡선, 우아한 여성, 아름다운 꽃과 자연 등이 주를 이룹니다. 무하의 작품들이 곧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셈이죠.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간 무하는 그곳에서도 엄청난 환대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강의도 하고 다양한 전시회도 열었죠.
그런데 1910년 그는 이를 뒤로하고 돌연 체코로 돌아왔습니다. 이때부터 무하의 작품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는데요.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담은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여정은 길고 지난했습니다. 1912년부터 14년간 총 20점의 작품을 그렸죠.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 이전과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을 그린 것은 무하가 평소 가지고 있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신과 연결됩니다. 그는 예술가라면 민족과 조국을 위한 작품들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죠.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이어가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요. 이로 인해 무하의 조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체코슬로바키아로 재탄생했습니다. 무하는 이를 축하하는 다양한 우표, 국가 휘장 등을 무상으로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무하의 이런 행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이 완성되기 전, 먼저 11점의 작품만으로 열렸던 전시회엔 6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하는 비극적인 말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9년 독일 나치가 프라하를 침공했는데요. 무하는 이들에 의해 체포돼 수차례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습니다. 그리고 79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나아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화폭에 담아낸 무하. 예술엔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삶과 작품들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의 작품입니다. 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곧 하나의 스타일이 돼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습니다. 작가가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스타일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작품명은 'F. 샹프누아 인쇄소 포스터'입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포스터, 달력 등에 들어갔던 겁니다. 포스터와 달력이 사람들에게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무하는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허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힙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닫혀있는 응접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를 통해 아르누보 운동의 상징이 된 무하의 삶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무하는 체코 모라비아의 이반지체 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곳으로 주로 수공업이 발달했습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도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죠. 이런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훗날 무하의 작품에 녹아들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법원 안내원이었던 아버지의 소개로 법원 서기로 일하면서도, 이웃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등 틈틈이 작업을 했습니다. 20대가 되어선 오스트리아 빈에 가 무대 디자이너로도 일했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파리로 떠나며 이뤄졌습니다. 운 좋게 큐헨 벨라시 백작 가문의 후원을 받아 파리 유학까지 갈 수 있게 됐죠.
무하가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엔 문화·예술이 찬란하게 꽃 피는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해 다양한 개성을 가진 예술가들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고 밤새 예술과 인생에 대해 토론하던 시기였죠. 무하는 이런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으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긴 무명 생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30대가 돼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책과 잡지, 포스터 삽화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오기 마련이죠. 무하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처럼 그 기회로 인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1894년 무하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백작 가문의 지원도 모두 끊어져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다른 직원들은 전부 휴가를 간 사이 무하는 홀로 인쇄소에 나와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리 르네상스 극장의 매니저가 급히 인쇄소를 찾아왔습니다. 새해 첫날 공연될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를 그릴 삽화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이 공연의 주연을 맡았는데요. 베르나르는 그전에 만들어진 포스터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장 매니저가 급히 삽화가를 찾아 나섰지만 휴일이라 구하지 못하고 무작정 인쇄소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혼자 인쇄소에 있던 무하는 덜컥 이 포스터 작업을 맡게 됐습니다. 그는 당시 파리에 판을 치던 선정적인 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2m에 달하는 길이의 포스터에 신비롭고 우아한 여성의 모습을 담아냈죠. 극장 매니저는 낯선 그림에 당황해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달랐습니다. 무하의 그림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앞두고 파리는 무하의 포스터로 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시민들도 무하의 포스터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몰래 포스터를 뜯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날 정도로 뜨거운 열풍이 일었죠. 그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순수 예술에 비해 폄하됐던 상업 예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입니다. 상업 예술도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이후에도 베르나르는 자신의 공연과 관련된 많은 작업들을 무하에게 맡겼습니다. 포스터는 물론이고 무대 디자인, 의상, 장신구 등까지도 무하가 만들었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좋은 파트너 관계를 맺고 함께 성장했습니다. 오랜 시간 재능을 갈고닦아온 아티스트, 그리고 탁월한 안목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믿어주는 후원자의 만남. 정말 이상적인 조합인 것 같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무하는 큰 부와 명예를 얻게 됐습니다. 12개의 별자리와 여인을 함께 그려 넣은 '황도 12궁'은 실내용 달력에 그려진 그림인데요. 이 그림으로 인해 달력 주문이 폭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4명의 여성을 통해 계절을 의인화하고 그 변화를 담아낸 '사계'도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하는 1890~1910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아르누보는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데요. 정형화된 전통 예술에서 벗어나 차별화된 양식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탄생한 아르누보 양식은 섬세한 곡선, 우아한 여성, 아름다운 꽃과 자연 등이 주를 이룹니다. 무하의 작품들이 곧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셈이죠.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간 무하는 그곳에서도 엄청난 환대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강의도 하고 다양한 전시회도 열었죠.
그런데 1910년 그는 이를 뒤로하고 돌연 체코로 돌아왔습니다. 이때부터 무하의 작품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는데요.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담은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여정은 길고 지난했습니다. 1912년부터 14년간 총 20점의 작품을 그렸죠.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 이전과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을 그린 것은 무하가 평소 가지고 있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신과 연결됩니다. 그는 예술가라면 민족과 조국을 위한 작품들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죠.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이어가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요. 이로 인해 무하의 조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체코슬로바키아로 재탄생했습니다. 무하는 이를 축하하는 다양한 우표, 국가 휘장 등을 무상으로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무하의 이런 행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이 완성되기 전, 먼저 11점의 작품만으로 열렸던 전시회엔 6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하는 비극적인 말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9년 독일 나치가 프라하를 침공했는데요. 무하는 이들에 의해 체포돼 수차례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습니다. 그리고 79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나아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화폭에 담아낸 무하. 예술엔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삶과 작품들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