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이민 100년] ③ '쿠바인이자 한국인'으로 사는 1천여명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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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데나스·아바나 등 쿠바 전역에 2∼6세대 1천88명 거주
현지 주류사회 섞여서도 한국인 정체성 함께 지켜 안토니오 김 함(78) 쿠바 한인후손회장은 지난 8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쿠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리셉션 자리에서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유리병 하나를 식탁 위로 꺼냈다. 병 안엔 조부모 때부터 전해온 방식으로 만든 양배추 김치가 들어있었다.
쿠바에서 나고 자란 김 회장은 김치 외에 고추장, 간장까지 집에서 직접 담가 먹는다고 했다.
김 회장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쿠바 전역엔 그와 같은 한인 후손들이 모두 1천88명 거주하고 있다. 카르데나스에 304명으로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수도 아바나에 268명, 마탄사스 159명, 카마궤이 147명, 마르카네와 올긴에도 각각 65명과 63명이 있다. 독립유공자 김세원의 손자인 김 회장은 할머니와 어머니도 모두 한인 후손이어서 한국인의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처럼 아직 쿠바인과 피가 섞이지 않은 후손들도 모두 40명이다. 1천88명의 한인 후손 중 1세대는 단 한 명도 없다.
쿠바 한인들을 다룬 전후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속엔 2019년 8월 100세 생일을 맞은 최고령 한인 후손 아르투로 배 리가 등장하는데, 당시 1세대 한인 300여 명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그도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없지만 후손들 상당수는 한국의 뿌리를 기억하고 있다. 여기엔 독립운동가 임천택(1903∼1985) 선생과 자녀들의 역할이 컸다.
2살 때인 1905년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로, 1921년 다시 쿠바로 이주한 임천택 선생은 마탄사스 민성학교, 카르데나스 진성학교에서 국어 교육을 하며 한인들이 조국의 언어를 잊지 않도록 힘썼다.
1954년엔 '큐바이민사'를 편찬해 1세대 쿠바 한인들의 이야기를 후대에 남기기도 했다.
광복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 사회의 결속이 다소 느슨해지고 1959년 쿠바 혁명과 곧 이은 미·쿠바 단교로 한국과 쿠바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도 옅어졌다.
세대교체와 함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점점 멀어질 것 같았던 쿠바 한인과 조국의 거리가 다시 좁혀지는 데엔 임천택의 장남 임은조(헤로니모 임·1926 ~ 2006)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바 혁명에도 참여하고 차관급 고위직에까지 오르며 쿠바 주류 사회에 안착했던 임은조는 1995년 쿠바 한인 중 처음으로 한민족축전 참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조국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게 됐다.
그는 한인회를 재건하기 위해 쿠바 곳곳을 돌며 한인 후손들 실태 파악에 나섰다.
발품을 팔아 작성한 명부를 토대로 한인회의 정부 인가도 추진했지만 수교국 북한을 고려한 쿠바 당국의 거부로 비공식 단체 한인후손회로 남게 됐다. 오빠와 함께 한인회 설립을 위해 힘썼던 마르타 임 김 전 마탄사스 종합대 교수는 작고한 역사학자 남편 라울 루이스와 함께 '쿠바의 한국인들'을 써서 부친에 이어 이민사 기록자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 속에 현재 많은 한인 후손들이 쿠바인이자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고 의사, 교수, 엔지니어 등 전문직으로 현지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도 많다.
임천택 선생의 손녀이자 아바나 최고 권위 병원에서 의사로 재직 중인 노라 임 알론소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도 뿌리에 자부심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여기까지 오면서) 차별이나 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며 "오히려 어디서든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더 주목받고 배려받았다"고 말했다.
한인 3세 화가인 알리시아 데라캄파 박(55)은 "쿠바인·한국인이라는 내 정체성이 아주 어릴 때부터 가치관이나 예술방식 내 삶의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2009년 전시회를 위해 찾았던 한국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그는 "한 달간의 방문을 통해 내 선조의 문화와 강한 영적 접촉을 경험했다"며 회고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쿠바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한인들은 함께 모여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한인후손회 카르데나스 지부 회장인 아델라이다 김(72)은 "300여 명의 카르데나스 한인 후손들이 1년에 4번이라도 계속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며 여러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카르데나스 한인회관과도 같은 그의 집엔 태극기와 부채, 김치 사진 등 한국의 소품들이 잔뜩 있다.
안토니오 김 함 회장도 전국에 흩어진 1천88명이 한자리에 모일 날을 꿈꾸고 있다. 회장직을 젊은 세대에게 곧 넘겨주려 한다는 김 회장은 "올해 이민 100주년에 모두 모이고 싶었는데 코로나19와 경제적 이유로 불가능했다"며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기회가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현지 주류사회 섞여서도 한국인 정체성 함께 지켜 안토니오 김 함(78) 쿠바 한인후손회장은 지난 8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쿠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리셉션 자리에서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유리병 하나를 식탁 위로 꺼냈다. 병 안엔 조부모 때부터 전해온 방식으로 만든 양배추 김치가 들어있었다.
쿠바에서 나고 자란 김 회장은 김치 외에 고추장, 간장까지 집에서 직접 담가 먹는다고 했다.
김 회장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쿠바 전역엔 그와 같은 한인 후손들이 모두 1천88명 거주하고 있다. 카르데나스에 304명으로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수도 아바나에 268명, 마탄사스 159명, 카마궤이 147명, 마르카네와 올긴에도 각각 65명과 63명이 있다. 독립유공자 김세원의 손자인 김 회장은 할머니와 어머니도 모두 한인 후손이어서 한국인의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처럼 아직 쿠바인과 피가 섞이지 않은 후손들도 모두 40명이다. 1천88명의 한인 후손 중 1세대는 단 한 명도 없다.
쿠바 한인들을 다룬 전후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속엔 2019년 8월 100세 생일을 맞은 최고령 한인 후손 아르투로 배 리가 등장하는데, 당시 1세대 한인 300여 명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그도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없지만 후손들 상당수는 한국의 뿌리를 기억하고 있다. 여기엔 독립운동가 임천택(1903∼1985) 선생과 자녀들의 역할이 컸다.
2살 때인 1905년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로, 1921년 다시 쿠바로 이주한 임천택 선생은 마탄사스 민성학교, 카르데나스 진성학교에서 국어 교육을 하며 한인들이 조국의 언어를 잊지 않도록 힘썼다.
1954년엔 '큐바이민사'를 편찬해 1세대 쿠바 한인들의 이야기를 후대에 남기기도 했다.
광복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 사회의 결속이 다소 느슨해지고 1959년 쿠바 혁명과 곧 이은 미·쿠바 단교로 한국과 쿠바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도 옅어졌다.
세대교체와 함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점점 멀어질 것 같았던 쿠바 한인과 조국의 거리가 다시 좁혀지는 데엔 임천택의 장남 임은조(헤로니모 임·1926 ~ 2006)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바 혁명에도 참여하고 차관급 고위직에까지 오르며 쿠바 주류 사회에 안착했던 임은조는 1995년 쿠바 한인 중 처음으로 한민족축전 참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조국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게 됐다.
그는 한인회를 재건하기 위해 쿠바 곳곳을 돌며 한인 후손들 실태 파악에 나섰다.
발품을 팔아 작성한 명부를 토대로 한인회의 정부 인가도 추진했지만 수교국 북한을 고려한 쿠바 당국의 거부로 비공식 단체 한인후손회로 남게 됐다. 오빠와 함께 한인회 설립을 위해 힘썼던 마르타 임 김 전 마탄사스 종합대 교수는 작고한 역사학자 남편 라울 루이스와 함께 '쿠바의 한국인들'을 써서 부친에 이어 이민사 기록자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 속에 현재 많은 한인 후손들이 쿠바인이자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고 의사, 교수, 엔지니어 등 전문직으로 현지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도 많다.
임천택 선생의 손녀이자 아바나 최고 권위 병원에서 의사로 재직 중인 노라 임 알론소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도 뿌리에 자부심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여기까지 오면서) 차별이나 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며 "오히려 어디서든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더 주목받고 배려받았다"고 말했다.
한인 3세 화가인 알리시아 데라캄파 박(55)은 "쿠바인·한국인이라는 내 정체성이 아주 어릴 때부터 가치관이나 예술방식 내 삶의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2009년 전시회를 위해 찾았던 한국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그는 "한 달간의 방문을 통해 내 선조의 문화와 강한 영적 접촉을 경험했다"며 회고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쿠바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한인들은 함께 모여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한인후손회 카르데나스 지부 회장인 아델라이다 김(72)은 "300여 명의 카르데나스 한인 후손들이 1년에 4번이라도 계속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며 여러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카르데나스 한인회관과도 같은 그의 집엔 태극기와 부채, 김치 사진 등 한국의 소품들이 잔뜩 있다.
안토니오 김 함 회장도 전국에 흩어진 1천88명이 한자리에 모일 날을 꿈꾸고 있다. 회장직을 젊은 세대에게 곧 넘겨주려 한다는 김 회장은 "올해 이민 100주년에 모두 모이고 싶었는데 코로나19와 경제적 이유로 불가능했다"며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기회가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