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겨울나무, 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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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겨울나무
공광규
저녁이 되어도
팔을 거두지도 않고
눕지도 않는 나무
별을 안아 보려고
저렇게 서서
겨울밤을 지키는 나무눈 온 아침
천 개의 팔에 반짝반짝
별 부스러기를 안고 있는.
[태헌의 한역]
冬樹(동수)
晩來不收臂(만래불수비)
亦不臥而暇(역불와이가)
欲抱天中星(욕포천중성)
直立守冬夜(직립수동야)
雪朝曜不絶(설조요부절)
千臂擁星屑(천비옹성설)[주석]
* 冬樹(동수) : 겨울나무.
晩來(만래) : 저녁이 되어, 저물녘에. / 不收臂(불수비) : 팔을 거두지 않다, 팔을 그대로 두다.
亦(역) : 또한, 역시. / 不(불) : ~을 하지 않다. / 臥而暇(와이가) : 누워서 느긋하게 쉬다. ‘暇’는 동사로 느긋하게 지내거나 한가하게 논다는 의미인데,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欲(욕) : ~을 하고자 하다. / 抱(포) : ~을 안다. / 天中星(천중성) : 하늘 가운데의 별. ‘天中’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直立(직립) : 곧게 서다. 원시의 “저렇게 서서”를 의역한 표현이다. / 守(수) : ~을 지키다. / 冬夜(동야) : 겨울밤.
雪朝(설조) : 눈 내리는 아침, 눈 내린 아침. / 曜不絶(요부절) : 반짝임이 끊이지 않다, 끝없이 반짝이다.
千臂(천비) : 천 개의 팔. / 擁(옹) : ~을 안다. / 星屑(성설) : 별 부스러기, 별 조각.
[한역의 직역]
겨울나무
저녁이 되어도 팔 거두지 않고
또 누워 느긋이 쉬지도 않으며
하늘 가운데의 별 안아 보려고
곧게 서서 겨울 밤을 지키는데
눈 온 아침에 끝없이 반짝임은
천 개의 팔이 별 조각 안은 것[한역 노트]
역자가 칼럼을 집필한 이래로 지금까지 같은 제목의 시로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경우는,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만나게 된 경우는 이 “겨울나무”가 유일하다. 겨울나무라는 말이 그렇게 흔하게 쓰이는 것도 아니고, 시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님에도 역자가 칼럼을 세 번씩이나 진행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순전히 우연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역자가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재무 시인과 박종해 시인의 “겨울나무”에 이어 공광규 시인의 “겨울나무”까지 한역하게 되었으니, 겨울나무와 역자의 인연도 어지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야생의 나무는 제 자리에서 겨울을 맞고 또 겨울을 보낸다. 저녁이 되었다 하여 가지를 거두지도 않으며, 쉬기 위해 몸을 눕히지도 않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비에 젖는 나무는, 눈이 오면 가지 위에 소담스럽게 눈을 쌓아두고 있다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게 할 뿐이다. 나무는 이렇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면서 오는 것을 맞거나 잠시 간직했다가 보낼 따름인데, 시인의 세심하고도 자상한 눈길이 마침내 나무를 거룩한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다.
시인의 세심하고도 자상한 눈길 덕택에 이 시의 주제를 ‘감내(堪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찬란한 아름다움’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듯하다. 나무가 손이 시리다고 팔을 거두거나 피곤하다고 누워버렸다면, 천 개의 팔에 별 부스러기를 반짝이게 하는 찬란한 아침을 빚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별 부스러기로 묘사된 ‘눈꽃’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기다린 나무에게 주어진 ‘찬란한 아름다움’이라면, 나뭇잎 다 지우고 가지만 남아 앙상한 나무들에게 이토록 고귀한 가치를 부여한 것은 시인의 따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인의 그 따스한 눈길은 ‘천 개의 팔에서 반짝이는 별 부스러기’에서 멎었다. “천 개의 팔”에 안겨 있던 별 부스러기들은, 마침내 약한 바람에도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지거나 햇살에 녹아 팔을 떠나갔을 것이다. 다시는 팔로 돌아가지 못하는 별 부스러기들이 보여준 것이 결국 찰나간의 아름다움일 뿐이라 하여도 겨울나무가 누린 호사로는 어디 비할 데가 없어 보인다.
대설(大雪)이 지났는데도 눈 소식이 감감한 것을 보면, 올해도 눈이 드문 겨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자는 언젠가 겨울은 눈이 있어 공평한 계절이 된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눈이, 흐르는 물과 같은 특수한 대상을 제외하고는 만상을 모두 흰빛으로 공평하게 덮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눈이 없는 겨울이 오히려 공평함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눈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리는 눈이 시인이 얘기한 별 부스러기처럼 아름답기만 하다면야 삼동 내내 눈이 내린들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역자는 한역시의 제목이 한역시 전체의 주어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1연과 2연에 있는 “나무”의 한역을 배제하였다. 그러나 원시의 3연은 부분적으로 “천개의 팔”을 주어로 하는 한역 시구로 재구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원시에 쓰인 시어의 위치를 제법 바꾸기도 하였다. 3연에서 부사로 처리된 시어인 “반짝반짝”을 ‘반짝임’이라는 주어로 재구성한 것은 한시의 언어 생리를 고려한 작업이자 한역의 난점을 여실하게 보여준 예(例)라고 할 수 있다.
역자는 3연 9행으로 된 원시를 6구로 이루어진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한역시의 4구까지는 짝수구에 압운하였으며, 5구와 6구는 운을 바꾸어 매구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暇(가)’·‘夜(야)’와 ‘絶(절)’·‘屑(설)’이 된다.
2021. 12. 14.<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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