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한한령은 보호무역이다

강현우 베이징 특파원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해제 신호로 기대를 모았던 아이돌그룹 엑소의 텐센트뮤직어워드(TMEA) 출연이 결국 불발됐다. 지난 11일 행사에서 주최 측은 엑소를 최우수 해외그룹으로 선정했고 뮤직비디오도 잠깐 보여줬다. 하지만 온라인 출연을 예고했던 엑소 멤버 카이와 세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TMEA는 중국 최대 음악 시상식이자 축제다. 온라인이라 해도 이런 대규모 행사에 K팝 스타가 출연한다면 2016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 조치 이후 첫 한한령 해제 사례가 될 터였다. 주최사인 텐센트뮤직은 당국이 목줄을 꽉 잡고 있는 중국 최대 인터넷 기업 텐센트의 계열사다. 여러 면에서 엑소의 출연은 한한령 해제로 볼 만했다. 하지만 결과는 ‘한한령은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데 그쳤다.

한류가 두려운 중국

업계가 기대하게 된 다른 계기도 있었다. 영화 ‘오! 문희’가 중국에서 개봉한 것이었다. 2015년 9월 ‘암살’ 이후 6년여 만에 중국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였다. 공교롭게도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일 중국 톈진에서 외교수장인 양제츠 공산당 정치국원과 회담한 바로 다음날 개봉했다.

회담 내용을 잘 아는 정부 관계자는 당시 “문화콘텐츠 분야를 강조했는데 (중국 측이) 굉장히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며 “시기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진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 당국자도 한한령 해제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함께 제시한 사례가 엑소의 TMEA 출연(예정)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도 상황을 오판한 셈이 됐다.

한 문화계 인사는 “오! 문희의 개봉은 주요 인사 방중에 대한 일종의 성의 표시였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 문희는 개봉을 불과 이틀 앞둔 지난 1일에서야 광고를 시작했다. 중국이 자신들의 체제와 배치되지 않는 영화를 부랴부랴 골랐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보면 6년 만의 한국 영화 개봉도 작은 이벤트였을 뿐이다.한한령 이후 크고 작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해제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가뭄에 콩 나듯 게임 판호(게임 유통 허가)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한한령 해제는 우리의 희망이었을 뿐 중국은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WTO 제소라도 해야

중국이 한한령을 유지할 것으로 보는 가장 큰 근거는 한류의 힘이 너무 강해졌다는 점이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 한류 콘텐츠의 수준은 5~6년 전과는 또 다른 단계로 도약했다. 중국 당국이 차단하고 있지만 중국인들도 이미 볼 만큼 본 상황이다. 이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순간 중국의 문화산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제 관계 전문가인 문일현 중국 정법대 교수는 “미국은 한국이 중국의 텃밭인 동남아시아에서 한류를 적극 전파해달라는 희망을 다양한 경로로 전달해오고 있다”고 했다. 한국 콘텐츠 안에 녹아든 자유와 인권 같은 가치가 확산하면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한령의 시작이 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한한령은 이미 보호무역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자국 산업뿐 아니라 체제까지 지키려는 보호무역이란 지적이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과의 갈등과 경쟁 속에서 수시로 ‘자유무역의 수호자’임을 강조해왔다. 한류 콘텐츠에도 자유무역 원칙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