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시범케이스 될라"…기업, 안전조직 강화·CSO 임용

산재 잦은 중화학·건설 등
안전보건 관련 조직 보강
책임자 직급도 대폭 상향

"CEO가 결국 형사책임"
정부 행정지침 강행의지 확고
산업계 "CEO 부재 피하려면
복수대표라도 뽑아야 하나" 불만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기업들이 안전보건 조직을 잇따라 신설하고 인력을 확충하고 있다. 포스코건설 직원들이 공사 현장 내 안전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 상황판을 보고 있다. 한경DB
“무조건 대표에게 책임을 지울 겁니다. 기업들 사이에선 시범 케이스만 되지 말자는 분위기입니다.” (10대 그룹 안전담당 임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기업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기업들은 최고안전책임자(CSO) 등의 직책을 신설하거나 관련 조직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산재 발생 시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형사처벌까지 규정한 중대재해법의 ‘첫 타자’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사장급으로 CSO 격상했지만…

14일 경제계에 따르면 국내 주력 제조산업인 철강, 화학, 조선 업종 주요 기업이 CSO 등의 직책을 신설하거나 대표급으로 지위를 격상하는 등 관련 조직을 강화하고 있다. 내년 1월 27일 시행을 앞둔 중대재해법에 대응한 행보다.
중대재해법은 근로자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경영책임자 등이 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 등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경우 처벌하도록 하는 법률이다. 근로자 사망 시 CEO를 포함한 경영책임자가 1년 이상 징역에 처해진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산업 특성상 안전사고 발생이 불가피한 철강, 조선, 화학 등 중화학산업 기업들은 안전보건 업무를 책임지는 CSO 직책을 신설하거나 직급을 높여 무게감을 싣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 3월 대표이사 사장(철강부문장) 직속으로 ‘안전환경본부’를 신설하고 본부장으로 이시우 부사장을 임명했다. 현대제철도 8월 사장 직속의 사업부급 안전보건총괄 부서를 신설하고 상무급을 담당으로 임명했다. CSO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지만 안전보건 관련 경영책임자를 임명한 것이다.SK이노베이션은 유재영 SHE(안전·보건·환경)본부장(총괄부사장)을 올초 SK 울산콤플렉스(CLX) 공장장으로 선임하고 권한도 더 부여했다. GS칼텍스 역시 생산본부장과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맡고 있던 이두희 부사장을 최근 인사에서 사장으로 임명하며 직급을 높였다. 현대중공업은 CSO 격인 안전경영실장직을 사장급인 이상균 조선해양 사업대표가 맡고 있다. 효성은 10월 최고운영책임자(COO) 직속으로 CSO직을 신설했다.

산재 사고에 민감한 건설업계도 마찬가지다. 롯데건설이 이달 12일 안전보건부문을 대표 직속의 ‘안전보건경영실’로 격상하고, 호반건설이 이달 인사를 통해 안전부문 대표이사직을 신설하는 등 관련 조직 강화에 나섰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높아진 장(長)의 위상만큼 안전관련 인력도 대폭 강화했다”며 “생산시설을 갖춘 웬만한 기업에선 관련 인력이 최소 20~30% 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식이면 ‘가게무샤’도 나올 것”

이 같은 행보 이면엔 중대재해법 시행 후 법이 적용되는 첫 사례가 돼 CEO가 형사처벌을 받는 ‘불상사’를 피하려는 절박함이 있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법이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을 최소한의 의무로 제시한 만큼 일단 전담조직을 꾸리고, CSO직을 신설해 자칫 CEO에게 몰릴 수 있는 책임의 화살을 조금이나마 분산하겠다는 것이다.하지만 정부는 11월 사실상의 정부 지침인 ‘중대재해처벌법(산업재해) 해설’을 발표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처벌 대상은 ‘사업 전반의 안전·보건에 관한 조직·인력·예산의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로 못 박았다. CSO가 어떤 직급이든 ‘최종 결정권’이 없는 이상 대표이사가 처벌 대상에서 제외될 순 없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정부의 완고한 대응이 되레 생산 현장의 안전 강화라는 법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기업 임원은 “형식적으로라도 결정권을 쥔 복수 대표를 선임해 언제 형사처벌을 받아도 경영 리스크가 없는 ‘가게무샤(그림자무사)’를 세우는 우회 경영마저 가능할 것”이라며 “중대재해법은 사고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찾는 정치적인 해결책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황정환/하헌형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