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경제 대통령'이라는 오랜 환상
입력
수정
지면A34
선거 최대변수는 늘 경제·민생책 광고는 8할이 과장에 가깝다고 한다. 제목과 광고 카피에 낚여 낭패 본 경험을 누구나 했을 법하다. 그렇듯 선거가 임박할 때 정치인의 언어도 8할이 과장과 망상이라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고, 투표는 유권자의 ‘신성한 권리’라는 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다.
화려한 공약에 초라한 결과 반복
이번에도 퍼주기 빼면 '빈 깡통'
"경제는 정치" 그런 측면 있지만
정치가 잠들 때 경제가 성장해
'해주겠다'보다 '안 하겠다' 없나
오형규 논설실장
빌 클린턴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1992년)라는 슬로건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래, 경제는 모든 민주국가 선거에서 최대 이슈로 다뤄진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경제 대통령’ 프레임을 선점한 것은 전략 면에선 확실히 선취 득점이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측이 부랴부랴 종부세 폐지, 연금개혁 등을 들고나왔지만 ‘50조, 100조 논란’처럼 갈피를 못 잡은 듯한 인상이 짙다. 하지만 여야 공약에서 돈 퍼주기를 빼고 나면 빈 깡통이나 다름없다. 포퓰리즘 원조 격인 허경영 후보가 두 후보를 ‘제자’로 여길 만하다.국민이 ‘경제 대통령’을 희구하는 것은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란 기대에서다. 성장·일자리 공약이 감초인 이유다. 하지만 ‘경제 대통령’은 오래된 환상이자 대중의 로맨스다. 상대 후보가 6% 성장한다니 좀 더 써서 7% 성장을 공약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747(7% 성장, 소득 4만달러, 7대 강국)’을 내건 이명박 대통령이나 오십보백보였다. ‘474(잠재성장률 4%, 고용률 70%, 4만달러)’의 박근혜 대통령과 소득주도성장의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던 때는, 이재명 후보도 인정했듯, 박정희·전두환 시절이었다. 개발연대 독재체제와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경제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를 기용하고 외풍을 막아주는 것을 대통령 역할 삼은 공통점이 있다. ‘경제 대통령’이 아니라 김재익 전 경제수석 같은 ‘경제만의 대통령’이 있었던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는 재주가 있다. “국가채무 적은 건 가계 지원 부족 탓” “주가조작범을 응징해 코스피 5000시대를 열겠다”는 말은 타당성 결여로 비판받지만 사람들의 귀에 쉽게 꽂힌다. 그가 서울대 경제학부 학생들에게 했다는 “경제는 과학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치”라는 말도 얼핏 들으면 타당해 보인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경제는 정치다》(2012)라는 책을 썼다. 하지만 두 주장은 정반대 대척점에 있다. 표현은 같은데 전혀 다른 뜻이다.이 후보 말은 선출된 권력 아래선 경제도 정치 하위수단임을 강조한 취지로 들린다. 뒤이은 말이 ‘부자들에게 싼 이자, 가난하면 비싼 이자’인 금융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최적·효율·신용을 지향해야 할 경제까지 똑같이 주자는 기본소득식 발상이나 공정·정의 같은 규범으로 접근하는 논점 일탈이다.
반면 이 전 부총리는 시장의 룰(정책)이 형성될 때부터 경제주체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계되도록 부단히 움직이기에 정책 결정 과정이 곧 정치 과정이란 현실을 언급한 것이다. 정부가 일을 추진할 때는 ‘정책적 선택’과 ‘정치적 책임’을 일치시키는 게 바람직하다는 경험에 입각한 얘기다. 요즘 방역을 놓고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걸 보면 정책적 선택과 정치적 책임의 불일치 탓이 크지 않나 싶다.
대선판에 경제담론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경제는 공약이나 의도대로 굴러가진 않는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역설적 결과를 낳기 일쑤다. 권력의 간섭·개입 강도가 클수록 필시 ‘중년의 뱃살’처럼 기득권이 두터워지고 지대추구가 만연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경제를 모르는 것보다 잘못 주입된 얕은 지식으로 고집스레 밀어붙이는 게 더 위험하다. 현 정부 5년간 목격한 대로다.“경제는 정치인이 잠자는 밤이나 공무원이 체육대회를 여는 시간에 성장한다”고 류동길 숭실대 명예교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반도체는 공무원이 몰라서, 한류는 지원을 빌미로 한 간섭이 없어 성공했다. 엉망진창 정치에도 수출이 또 신기록을 세운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과 관료가 해줄 게 별로 없어서다.
지금껏 경험에 비춰 ‘경제 대통령’은 환상이자 허상이다. 그래도 ‘경제를 살릴 대통령’을 기대한다면 뭔가 ‘해주겠다’는 것 말고 정부가 해선 안 될 일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먼저 받아내야 한다. 재주 많은 국민과 기업은 내버려두면 더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