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중대재해법에 CEO 못 바꾸는 외국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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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나면 처벌…한국 기피 조짐“한국에 선뜻 오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외국계 기업은 한국 법인의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할 때 애를 먹게 될 겁니다.”
"신의 영역까지 CEO 책임이란 꼴"
남정민 산업부 기자
최근 만난 한 외국계 대기업 CEO는 내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외국계 기업이 겪게 될 ‘웃픈’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지금 CEO가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서 근무하도록 할 수도 없고, 여러 가지로 난감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중대재해법은 CEO 등에게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부과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이 법을 둘러싼 외국계 기업들의 불만은 생각보다 크다. 다른 국가의 입법 사례와 비교해 처벌 수위가 과도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CEO는 “경영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 예측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며 “하지만 지금의 중대재해법은 ‘신의 영역’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토로했다.
한국 근무를 기피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CEO 교체 시기가 된 A사는 최근 이사회에서 새 CEO를 선임하려 했으나 당사자가 막판에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불가항력적인 사고가 발생해 기소라도 되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것 아니냐”며 다른 국가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후문이다.안전한 일터를 만들자는 중대재해법 취지에 반대하는 기업은 없다. 문제는 사업 현장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사고 여부와 처벌에만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안전전담조직을 꾸리고, 관련 설비에 돈을 투자하고, 매뉴얼을 마련해 교육해도 날씨가 더워 잠시 안전모를 벗은 사이 발생할 수 있는 사고까지 처벌하면 어떻게 기업을 경영할 수 있겠느냐는 불만도 나온다. 기업들은 경제단체를 통해 과도한 처벌에 대한 우려와 법안 수정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결국 크게 바뀐 건 없었다.
고용노동부는 막을 수 없는 사고의 책임까진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금 규정으로는 모든 사고가 CEO의 책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예컨대 CEO가 지켜야 하는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가 정확히 어떤 의무인지 매우 모호하다. 법에선 ‘사업장 특성을 고려해 조치하라’고만 규정하고 있다. 법을 지키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법을 지킨 것으로 간주되는지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기업들이 “차라리 CEO가 해야 할 행동,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법에서 규정해주면 좋겠다”고 호소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 한국이 외국 기업 CEO의 기피국만이 아니라 투자 기피국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