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을 깨고 빚어낸 아름다움, 드뷔시[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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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마치 아름다운 달빛 아래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잔잔하고 로맨틱한 선율이 빚어낸 순간의 마법일까요.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 클로드 아실 드뷔시(1862~1918)의 대표곡 '달빛'입니다. 영화 '트와일라잇'의 OST, 광고 음악으로 활용돼 친숙하실 겁니다. 국내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즐겨 연주하는 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달빛' '아라베스크'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을 만든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주자로 꼽힙니다. 인상주의 미술은 익숙한 반면 인상주의 음악은 생소하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드뷔시뿐 아니라 '볼레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을 만든 모리스 라벨이 인상주의 음악가에 해당됩니다.
이들이 창조해낸 인상주의 음악은 어떤 매력을 갖고 있을까요. 기존의 규칙을 깨며 새로운 음악 세계를 구축한 드뷔시의 생애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인상주의 음악은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습니다. 인상주의 미술은 원근법 등 정형화된 공식을 깨부수며 미술사를 새롭게 썼습니다.
빛과 자연을 바라보며 순간을 포착하고,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그 생생함을 화폭에 담아냈죠.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이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들입니다.
인상주의 음악도 비슷합니다. 화성법, 대위법 등 규칙에서 벗어나 특정 장면이나 순간, 분위기를 자유롭게 선율로 표현했습니다. '달빛'을 들으면 달이 뜬 밤하늘과 낭만 가득한 분위기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드뷔시는 어렸을 때부터 고정된 틀에 갇혀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죠.
드뷔시는 1862년 파리 인근 지역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도자기를 파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가게가 문을 닫으며 모두 파리로 이사하게 됐습니다. 생계를 이어가는 게 힘들었지만 드뷔시가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자, 그의 고모는 레슨비를 대신 내주며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덕분에 드뷔시는 10살이 되던 해에 파리국립음악원까지 가게 됐는데요. 그는 이때부터 형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피아노로 뛰어난 성적을 거뒀으면서도 화성학 등에선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홀로 자유롭게 음정, 박자 등을 연구하고 활용했죠. 음악원을 나오고 나서도 꽤 잘 풀렸습니다. 17살이 되던 해엔 슈농소 성의 상임 피아니스트가 됐고, 다음 해엔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 가족의 피아노 교사가 됐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피아노 트리오 G장조' 등 다양한 작곡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그는 '로마 대상' 경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연은 높은 경쟁률을 자랑했는데요. 파리국립음악원 출신 작곡가들이 대거 출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죠.
이곳에서 우승을 하면 로마 유학의 기회를 주고, 대중에게 널리 이름을 알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뷔시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이 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고 1885년 로마로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 속에서도 드뷔시는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로마에서 받는 수업들이 틀에 박혀 있고, 지루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선 오페라 음악이 발달했는데 드뷔시는 이 또한 자신의 음악 스타일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결국 3년 동안 로마와 파리를 수차례 오가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파리로 온 그는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인상주의 음악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90년 피아노곡 4곡을 엮은 <베르거마스크 모음곡>을 내놓았는데요. '달빛'은 이중 한 곡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모음곡 작품들엔 드뷔시가 새로운 악기를 접하면서 얻은 영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는 파리에서 열린 한 박람회에 갔다가 우연히 인도네시아의 타악기 가믈란 연주를 듣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로움에 매료돼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선율을 만들어냈죠.
드뷔시가 1894년 선보인 교향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곡으로도 꼽힙니다. 특히 플루트 연주가 인상적인데요. 그 선율이 울려 퍼지면 목가적이면서 환상적인 세계가 함께 펼쳐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 곡은 오후에 졸고 있던 목신이 잠에서 깨어나, 환영처럼 나타난 요정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드뷔시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자연에서 부는 바람, 꿈이 담긴 장면들이 연속으로 펼쳐진다."
드뷔시의 자유분방함은 음악에서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유명한데요. 드뷔시로 인해 두 명의 여성이 자살 기도를 해 '암흑의 왕자'란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가 20대였을 땐 30대 유부녀인 마리 바스니에 라는 여성을 만났는데요. 둘의 사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드뷔시는 바스니에를 뮤즈로 삼고 27개에 달하는 곡을 만들어 헌정했습니다.
이후 1890년부터 3년 동안은 재봉사 딸인 가브리엘레 뒤퐁과 동거를 했습니다. 그런데 동거 중 가수 테레즈 로제를 만나, 돌연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복잡한 사생활이 논란이 돼 로제와의 약혼이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드뷔시는 뒤퐁에게 다시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뒤퐁의 친구였던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해 버렸죠. 그러자 뒤퐁은 자살 기도를 했습니다. 다행히 뒤퐁은 목숨을 잃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드뷔시와 텍시에의 결혼 생활도 위태로웠습니다. 드뷔시는 결혼 생활 중 제자의 어머니인 엠마 바르닥 이란 여성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텍시에는 친구였던 뒤퐁처럼 똑같이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텍시에도 살아남았지만 두 사람은 이혼을 했습니다.
결국 드뷔시의 마지막 부인은 엠마가 됐습니다. 그는 엠마와 딸을 낳고 나서야 뒤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자신의 사생활에 많은 지인들이 등을 돌린 것을 감안해 결혼을 최대한 늦췄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도 드뷔시의 음악은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영국 헝가리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이름을 알렸죠. 복잡한 사생활 논란을 뛰어넘을 만큼 자유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요. 드뷔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 작품은 규칙을 만들 수 있지만, 규칙은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없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