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반도체 굴기' 막히자…한국 첨단기술 빼돌리는 중국 [박신영의 일렉트로맨]

특허청, 반도체기술 중국에 유출 시도 적발
중국 반도체 시장, 정부 지원 힘입어 급성장
미국 정부, 첨단장비 유입 막고 반도체 기업인수 제지
전문가들 "미국 정부 제재해도 중국 반도체 성장 막기 어려워"
중국 반도체기업 SMIC의 반도체 칩. 한경DB
최근 한국 반도체 업계에선 가슴을 쓸어내린 사건이 하나 있었다. 국내 공장설비업체 직원 및 무역중개업체 대표 등 2명이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생산에 쓰이는 첨단설비 중 하나인 OHT(천장대차장치) 관련 기술을 중국으로 빼내려다 특허청에 적발됐기 때문이다. 피해 회사는 2020년 매출 1조5500억원인 코스닥 상장업체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관련 대기업 등에 관련 설비를 납품하는 중견기업이다. 천장대차장치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생산설비 등에 주로 사용되는 무인반송장치다.

업계에선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첨단기술을 들여오기 어려워지자 부적절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술을 유입하려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한국의 반도체 기술을 지키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중국 기업들의 반도체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어야한다는 경고도 나온다. 중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반도체 기술 발전을 독려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한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위기감도 퍼지고 있다.

반도체 중국몽(中國夢)

세계반도체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시장규모는 2010년 570억 달러에서 2020년 1434억 달러로 급성장했다. 특히 2016년 이후 연평균 12%씩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같은 기간 글로벌 반도체 전체의 연평균 성장률 6%를 두배나 상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의 반도체 시장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다. '중국제조 2025'가 대표적이다. '중국제조 2025'는 지난 2015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제조업 고도화 전략이다.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 2025년 70%로 끌어올린다는 게 핵심 목표였다.

중국 정부는 이 목표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2019년 기술·벤처기업 전용 증시인 '커촹반'을 개설했다. 커촹반에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 SMIC를 비롯해 인공지능(AI) 반도체 업체 캠브리콘테크놀로지, 리튬배터리 1위 기업인 톈넝배터리 등 197개 기업이 상장돼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요한 자금조달 창구로 평가받는다. 앞서 2014년엔 반도체 스타트업과 연구개발(R&D)에 투자할 1387억 위안(약 26조 원) 규모 의 '빅펀드'를 만들었다. 중국재정부, 중국개발은행 등 정부 기관과 중국연초, 중국이동 등 국유 기업들이 자금을 댔다. 중국 정부는 2019년 7월 2000억 위안(약 37조 원)을 추가 투입해 2차 ‘빅펀드’를 만들기도 했다.

미국의 견제에 막힌 중국의 반도체 굴기

하지만 중국의 이같은 움직임을 본 미국 정부가 바로 견제에 나섰다. 중국이 반도체 주도권을 가져갈 경우 미국 제조기업들의 목줄이 중국 손 안에 놓일 수도 있어서다. 우선 중국의 첨단장비 반입을 막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ASML이 만든 극자외선 노광장비(EUV)의 중국 수출 허가를 계속 보류 중이다.

중국의 해외반도체 기업 인수도 제동걸고 있다. 최근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 기업 매그나칩의 중국 사모펀드(PEF)로의 매각도 무산됐다. 매그나칩은 지난 14일 공식 성명을 통해 "PEF운용사인 와이즈로드캐피탈로의 합병 계약이 미국 외국인 투자 위원회(CFIUS)의 승인을 얻지 못해 종료됐다" 밝혔다. 매그나칩은 국내 청주와 구미에 생산설비를 두고 있지만 회사가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됐다보니 CFIUS의 심사 대상이 됐다. 앞서 7월 미국 정부는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대만 TSMC가 중국 난징의 12인치 웨이퍼(반도체 원판) 공장을 증설하려는 계획에 대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도울까 우려된다"며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TSMC는 난징 공장에 28㎚(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공정 라인을 추가해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반도체 업계 "중국 여전히 위협적"

미국의 이같은 견제로 한때 중국의 반도체 산업 성장도 정체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아직은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고 양산에 들어가 수익을 내는 데까지 10년 이상 걸리는 데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본격 투자한 지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무엇보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며 "정부의 일관성 있는 투자가 있다면 반도체 기술도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도 최근 '거대한 기술 경쟁: 21세기의 중국 대 미국'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중국이 반도체를 비롯해 인공지능(AI)과 5세대 이동통신(5G)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10년 내로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고서는 중국이 10년 안으로 △AI △5G △양자정보과학 △바이오기술 △반도체 △친환경에너지 등 21세기 핵심 기초 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심지어 안면인식, 음성인식 핀테크 등 AI의 실용 분야에선 중국이 미국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 중국의 반도체 생산량은 전 세계의 1%도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15% 수준으로 미국을 추월했다. 미국의 비중은 1990년 37%에서 현재 12%로 낮아졌다.저자인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중국과 경쟁하려면 전략 기술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더 필요하다"면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했던 것처럼 기술을 국가적으로 동원하지 않는 한, 중국은 곧 미래 기술을 지배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