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 먼저 할게요"…백화점 명품 매장서 벌어진 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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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6번째 가격 인상 단행이달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명품 매장에선 제품은 없지만 물건 값을 결제하는 고객들로 넘쳐나는 기현상을 빚었다. 인터넷 명품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곧 가격이 오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미리 값을 지불하고 웨이팅(구매 대기)을 걸어놓으려는 고객들이 몰린 것이다.
미리 정가 내고 예약 구매하는 '완불 웨이팅' 행렬 이어져
수개월 기다려도 "가격 인상 전 무조건 사야"
이른바 ‘완불 웨이팅’을 진행한 셈인데 당장 물건을 못 사더라도 미리 결제를 해놓으면 가격이 인상돼도 기존 가격에 제품을 받을 수 있다. 매장 관계자는 “길게는 3~4개월을 기다려야 상품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지만 그래도 미리 물건 값을 결제하겠다는 고객이 많다”고 설명했다.코로나19 이후 명품 업체들이 한 해에도 여러 차례 가격 인상을 강행하면서 이처럼 매장에선 미리 물건 값을 내고 대기하려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 언제 기습적으로 가격이 오를지 몰라 당장 사고 싶은 제품이 없더라도 일단 결제부터 하고 보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명품 브랜드 프라다는 지난 17일 대다수 가방 제품 가격을 5~10%가량 인상했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듀엣 나일론 숄더백’은 164만원에서 179만원으로 약 9.1%(15만원) 올랐다. ‘리나일론 및 사피아노 가죽 숄더백’은 239만원에서 약 17.1%(41만원) 상승한 280만원으로 책정됐다. 프라다는 올해 들어 6번이나 가격을 인상했다. 지난 1월 평균 2~4% 인상을 시작으로 4월, 5월, 7월, 8월, 12월까지 일부 제품군의 가격을 올렸다. 나일론 버킷백의 경우 지난 1월 139만원에서 143만원으로 3%(4만원) 인상된 것을 시작으로 계속 몸값이 올라 현재가는 179만원에 달한다. 1년 동안 약 28%(40만원)나 오른 것이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소비자들은 제품이 있는 곳을 찾아 타 지역까지 매장을 도는 '원정 쇼핑'에 나서거나, 이마저 여의치 않으면 미리 비용을 지불하는 완불 웨이팅까지 감수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의 재고가 없을 때 가격을 다 지불하고 제품을 나중에 찾으러 가는 것이다.
물건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가격 인상 전에 무조건 제품을 구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달 초 프라다에서 모자를 사기 위해 완불 웨이팅을 한 박모 씨(35)는 “지난주 가격 인상 소식이 나온 것으로 보고 역시 ‘명품은 오늘이 제일 저렴하다’는 말을 실감했다”며 “아직 물건을 받지 못했지만 대기를 걸어놔 뿌듯하다. 미리 움직인 덕분에 물건값을 아낄 수 있었다”고 했다. 박 씨가 산 모자는 기존 63만원에서 이번에 68만원으로 인상됐다.코로나19 이후 명품 업체들의 가격 인상은 유례없이 잦아졌다. ‘오픈런’의 원조인 샤넬은 올해 4차례 가격을 올렸고 루이비통은 5차례 인상했다. 보테가 베네타, 버버리, 셀린느 등 다른 명품 브랜드들도 1∼3차례 가격을 올렸다. 앞으로도 디올·구찌·델보 등 명품 브랜드들이 연말이나 연초에 줄줄이 가격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그나마 웨이팅을 받는 업체들은 미리 결제라도 하지만 일부 예약 대기 결제도 허용하지 않는 매장에선 오픈런 행렬만 길어지고 있다.
명품 가격 인상 소식이 있을 때마다 인상 전 가격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매장을 더 자주 찾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샤넬·에르메스·불가리 등 일부 인기 명품들은 완불 웨이팅을 하더라도 제품을 찾는 시점에 가격이 오르면 차액을 받는 ‘배짱 영업’까지 하고 있다.한 업계 관계자는 “재고는 들여놓지 않고 대기는 받은 채 물건이 들어오면 추가로 돈을 지불하라는 배 째라식 영업 행태”라면서도 “그래도 명품을 사겠다는 대기자들은 줄을 섰으니 명품업체들이 소비자들을 두고 수시로 가격을 올리는 ‘갑질’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연이은 가격 인상에도 국내 명품 시장은 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조사회사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명품 판매액은 18% 줄어든 반면 한국의 명품 판매액은 135억3970만 달러(약 15조1792억 원)로 전년과 비슷한 수준을 나타냈다. 순위로는 7위로 올라섰다. 한국보다 앞선 나라 가운데 판매액이 증가한 국가는 중국(2위) 뿐이었다. 미국(1위) 일본(3위) 프랑스(4위) 등은 20%가량 판매액이 줄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