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블러'에 꽂힌 신용평가사

[한경 CFO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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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업이든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 시기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순간과 어떤 모습인지는 당시엔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눈치는 챌 수 있습니다. 최근엔 정보통신기술(ICT)이 그렇습니다. ICT 기술이 모든 산업 분야에서 등장해 산업 전체의 발전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모습입니다. 빅데이터를 포함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거든요. 요즘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빅블러(Big Blur)란 단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빅블러는 기존 산업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각 산업이 뒤섞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빅블러 현상이 단기간 심화하고 있는 덴 코로나19 영향도 있습니다.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산업 구조 개편이 코로나19를 계기로 한층 속도를 내고 있거든요. 전통적인 오프라인 산업의 위축과 비(非)대면 산업의 급격한 팽창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이런 산업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셈법이 복잡해진 집단은 바로 신용평가사들입니다. 신용평가사들은 기업의 사업·재무 펀더멘털(기초체력)을 파악하고 분석해 적절한 신용등급을 매기는 일을 합니다.

이들이 매긴 신용등급은 기업들이 자본시장에서 각종 자금을 조달할 때 사용됩니다. 쉽게 말해, 조달 비용 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죠. 기관투자가들은 신용등급 수준에 따라 투자 리스크(위험 요인)를 계산하고요. 최근엔 개인투자자들까지 기업 신용등급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장기 투자를 생각한다면, 당장 기업들이 내놓는 실적만 보지 않고 그간의 흐름과 앞으로 사업·재무 전망이 중요하단 걸 인식해서랍니다.

이렇듯 자본시장의 핵심 인프라인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신용평가사들인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마다 정형화돼 있는 기존 신용평가방법론에 얽매여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 구조나 사업 형태의 신용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시장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거든요.코로나19 확산 기간 신용평가사들이 기존 신용평가방법론 개정에 주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산업 구조 개편 움직임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국내 신용평가사 중에서 가장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곳은 나이스신용평가입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올 4분기 들어 적극적으로 기존 산업별 신용평가방법론 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식품 부문입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종전에 식품 산업과 주류 산업을 구분해 신용등급 평가 기준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식품과 주류 산업의 구분 필요성이 낮아졌다는 판단에서 두 산업의 신용평가방법론을 통합·개정키로 했습니다. 주류 산업을 식품 산업의 세분화된 업종으로 보는게 더 타당하다고 본 것이랍니다.송동환 나이스신용평가 선임연구원은 "식품과 주류 산업의 특성이 유사해 별도의 신용평가방법론을 적용할 실익이 크지 않다"며 "동일한 신용평가방법론을 적용하는 게 다양한 식음료 제조 기업 간 비교 가능성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통신서비스 산업도 또 다른 예입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통신서비스 산업의 신용평가방법론 일부를 개정했습니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기업들이 그간 큰 변화가 없던 국내 통신서비스 시장을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죠. 통신서비스 산업의 환경이 변하고 있는 만큼 기존 평가 지표 일부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겁니다.

핵심은 기존 사업위험 평가 요소 중 다변화 수준 지표를 통신사업 다변화와 사업 다각화 수준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송영진 나이스신용평가 선임연구원은 "통신 기술 발달로 비 통신 산업과 연계성이 원활해지면서 산업 간 융합 양상이 확대되고 있다"며 "주요 통신사들이 지속적으로 비 통신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결정"이라고 말했습니다.한국신용평가도 분주한 모습입니다. 실제 최근엔 네이버·카카오 등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시각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주된 내용은 과거에 비해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긍정적인 내부 인식이 강해졌다는 겁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온라인 수요 여건이 더욱 우호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데다 각종 서비스 확장과 연계로 사업안정성이 높아졌다는 이유에섭니다.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정부의 각종 규제가 강화되고 있지만. 확대된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의 영향력과 파급 효과를 통제하는 건 쉽지 않다는 판단이었죠.

이 때문에 한국신용평가는 이달 카카오의 장기 신용등급을 평가하면서, 지난 4월 등급 소멸 당시(AA-)보다 한 단계 높은 AA를 부여했습니다. 서민호 한국신용평가 선임연구원은 "글로벌 확장과 콘텐츠 부문의 경쟁력을 봤을 때 강화된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 규제로 성장이 둔화될 우려는 크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신용평가사들의 이런 시각 변화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신용평가방법론은 시계열적으로 일관성 있고 통일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었습니다. 새로운 산업 환경 변화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죠. 단기적인 시각이나 변화 때문에 이벤트적으로 신용평가방법론이 개정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분명한 건 기존 신용평가방법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업 형태와 산업 구조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엔 견고하기만 했던 특정 기업의 신용도가 무너지거나 예상치도 못했던 '라이징 스타'(투기 등급에서 투자 등급으로 뛰어오른 기업)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20년 가까이 신용평가사에 몸 담고 있는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AA급 정도 되려면, 번듯한 공장도 있고 눈에 보이는 생산품도 있고, 기본적으로 사업 모델의 틀이 확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어요. 몇 년 새 확 달라졌죠. 기존 평가 잣대와 지표로는 신용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지고 있답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