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외할머니와 국수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paperface@naver.com
어제 식사 자리에서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당신들 세대가 정부 덕을 본 것이 가장 없는 세대라고. 스무 살에 맨몸으로 서울로 와 시장바닥에서 안 해본 일 없이 어렵게 자리를 잡고, 나중에는 자식 넷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출가시킨 분이니 말해 무엇하랴.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로 치자면 장모님보다 정부 덕을 본 게 더 없는 세대일 것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어린 자식이 다섯이던 외할머니는 강원 속초 대명포구 어귀에 집도 절도 없이 피란민처럼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셨다. 땅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장에서 뭐라도 파는 게 생계를 잇는 방편이었다. 처음에는 큰 항아리를 구해 짚으로 감싸고 그 안에 팥죽을 넣어 다니며 장사를 하셨고, 어선에서 생선을 떼어다가 이문을 붙여 팔기도 했고, 나중에는 국수 장사를 오래 하셨다.내가 어릴 때 외가에 이모들과 함께 모이면 점심으로 잔치국수를 자주 먹었는데 이상하게 할머니는 국수에 전혀 입을 대지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부채질을 하거나 강아지 밥 주러 마당에 나가곤 하셨다. 하루는 왜 국수를 드시지 않냐고 여쭤보니 대답하시길 젊을 때 너무 국수만 먹어서 진절머리가 나서 싫다는 것이다. 국수 장사를 할 때는 아침에 일하러 나갈 때도 국수가 밥이고, 점심때도 국수를 먹었으며, 저녁때도 팔다 남은 국수를 드셨다고 한다. 집에서 먹는 국수는 시장에서 뜨거운 장국에 한 그릇 잘 말아서 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각종 채소를 넣어 된장과 함께 푹 끓여 양을 늘린 풀죽 같은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외할머니가 싫어한 국수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멸치육수를 내서 말아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야심한 시각에 신김치를 잔뜩 넣고 국수와 푹 끓인 풀죽 같은 걸 가장 좋아한다. 뿐만 아니다. 강원도 분이라 늘 밥 대신 감자를 드신 외할머니는 감자라면 손사래를 치곤 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또 감자다. 감자라면 정말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 그냥 쪄먹거나, 버터와 사카린을 넣고 쪄먹기도 하고, 감자를 갈거나 채를 썰어서 전을 부쳐 먹기도 하고, 찐 다음에 설탕·버터와 함께 으깨서 떠먹기도 한다. 두 식구지만 먹는 건 나 하나인데 봄이 되면 늘 감자를 한 상자 주문해서 먹을 정도다.

왜 나는 외할머니가 그렇게 싫어한 국수와 감자를 이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불효자식인가? 한국 사람이라면 다들 즐기는 음식이지만 유독 남들보다 집착적으로 좋아하는 나인지라 스스로도 왜 그런지 가끔 궁금해지곤 한다. 혹시나 격세 유전으로 배고프고 안 좋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친밀성만 남아 그 맛을 원하게 된 것일까?

엊그제도 아침에 밥이 없어 간단히 국수를 삶아 해장을 했는데, 국물 위로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의 기억이 살포시 머물다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