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 "우승이란 말은 늘 가슴 뛰게 해…올해도 승수 쌓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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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 위의 승부사들 (4) 박인비할아버지는 손녀 이름을 ‘어진 왕비’가 되라는 뜻에서 ‘인비(仁妃)’라고 지었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바람을 넘어 세계 여자골프의 ‘여제(女帝)’가 됐다. 골프선수 박인비 이야기다. 올해 서른넷. 운동선수로는 내리막길을 걸을 나이지만 박인비는 여전히 세계 골프계의 권력자다. 지난해 3월 KIA클래식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현재 세계랭킹 4위다. 미국 출국을 앞두고 만난 박인비는 지난 시즌에 대해 “만족할 만했다. 할아버지 뜻대로 내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것 같아 다행”이라며 웃었다.
한국선수 최다 24승에 -3
정복 못한 메이저 대회 에비앙
팬들 기대만큼이나 우승 간절
부상 떨친 우즈 복귀는 큰 울림
마지막까지 매홀 최선 다하겠다
올림픽 출전 가장 기억에 남아
다음 올림픽 참가는 무리
실력 좋은 후배들이 일낼 것
메이저대회 7승을 포함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통산 21승. 박인비의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로 4개 메이저대회를 우승하는 그랜드슬램도 달성했다. 왼손 엄지 부상이 심해 출전 철회 직전까지 갔던 2016 리우올림픽에선 금메달을 수확해 세계 최초로 ‘골든 커리어그랜드슬램’도 이뤘다. 지난해 7월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선 후배들과 경쟁해 자력으로 출전권을 확보한 뒤 참가했다.박인비보다 세계랭킹이 높은 한국 선수는 고진영(26)이 유일하다. 올림픽 2연패에는 실패했지만 박인비는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고 말했다. “결과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올림픽 출전은 지난 시즌 우승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에요.” ‘전설’이라고 불릴 만한 업적을 쌓은 그는 이제 “아름다운 착륙을 원한다”고 했다. 박인비는 “2024 파리올림픽까지 선수로 참가하기엔 무리일 것 같다”며 “쟁쟁한 실력을 갖춘 후배가 많으니 그들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천하의 박인비도 극심한 슬럼프로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고, 세계 최정상급 기량을 펼치고도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민무늬 모자를 쓴 적도 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6·미국)의 인생처럼 그의 삶도 굴곡으로 가득했다. 박인비는 “너무 힘들었고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며 “첫 산은 넘기 힘들었지만, 이후 산을 넘을수록 숨이 덜 찬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패도 반복되니 적응하게 됐다”고 돌아봤다. 그렇기에 최근 심각한 다리 부상을 떨치고 필드로 복귀한 우즈의 경기는 그에게 더 큰 울림을 줬다고 한다.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하기까지 우즈가 얼마나 자신을 담금질했을지 느껴져 감동적이었습니다. 왜 그가 ‘황제’인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선수라고 평가받는지 스스로 증명한 것 같아요. 우즈의 무기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인내와 끈기가 아닐까요.”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지만 그의 목표는 여전히 우승이다. LPGA투어에서 21승을 거둔 박인비는 박세리(44)의 한국인 최다승 기록(24승)까지 3승만 남겨두고 있다. 메이저대회로 편입되기 전인 2012년 우승한 에비앙 챔피언십도 남은 숙제다. 에비앙 챔피언십을 또다시 제패하면 골프 선수로는 최초로 ‘슈퍼 골든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박인비는 “팬들의 기대를 잘 알고 있고, 저도 그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강박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우승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제 가슴을 뛰게 합니다. 올해에도 우승을 추가하는 게 목표예요. 커트탈락이 잦아지고 경쟁력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는 한 홀 한 홀 최선을 다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겠습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