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겨울 산에서, 정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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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에서

정석권겨울 산
마른 나무들
행복하다

버릴 수 있는 것
모두 버렸으므로

메마른 나무들
의연히 서 있는
겨울 산에서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눈앞에서 세상이
바뀌고 있으므로

[태헌의 한역]
寒山(한산)寒山瘦樹應幸福(한산수수응행복)
可棄諸物已盡棄(가기제물이진기)
踏葉遊寒山(답엽유한산)
瘦樹依然位(수수의연위)
忽逢下雪當幸運(홀봉하설당행운)
眼前世上自新異(안전세상자신이)

[주석]
* 寒山(한산) : 썰렁한 겨울철 산. 이 말은 또 ‘겨울 산에서’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瘦樹(수수) : 마른 나무. 잎사귀를 다 떨어뜨린 나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應(응) : 응당.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幸福(행복) : 행복.
可棄(가기) : 버릴 수 있다. / 諸物(제물) : 여러 물건, 모든 것. / 已(이) : 이미.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盡棄(진기) : 다 버리다.
踏葉(답엽) : 낙엽을 밟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遊寒山(유한산) : 겨울 산을 노닐다. 원시의 부사구 “겨울 산에서”를 문장으로 변환하면서 취한 표현이다.
依然(의연) : 의연히. / 位(위) : 자리하다, 자리하고 있다.
忽逢(홀봉) : 갑자기 ~을 만나다, 문득 ~을 만나다. / 下雪(하설) : 내리는 눈. / 當(당) : 당연히. ~에 해당한다는 뜻의 동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 幸運(행운) : 행운. 이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져 동양 3국에서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한자어이다.
眼前(안전) : 눈앞, 눈앞에서. / 世上(세상) : 세상. / 自(자) : 스스로, 저절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新異(신이) : 새롭고 기이하다, 새롭고 기이하게 바뀌다. 역자가 바뀐다는 의미로 골라본 한자어이다.

[한역의 직역]
겨울 산에서겨울 산 마른 나무들은 응당 행복하리라
버릴 수 있는 모든 것 이미 다 버렸으니
낙엽 밟으며 겨울 산을 노닐면
메마른 나무들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데
내리는 눈을 문득 만나는 것은 행운이지
눈앞에서 세상이 절로 바뀌고 있으므로

[한역 노트]
대개 을씨년스럽기 마련인 겨울 산에서 시인이 이끌어낸 두 개의 화두는 뜻밖으로 “행복”과 “행운”인데, 행복은 나무의 행복이고 행운은 사람의 행운이라는 점에서 둘은 차별적이다. 그러나 나무의 행복이라고는 해도 기실은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행복이므로, 나무의 상태와 유사한 사람의 상태가 곧 행복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행복과 행운은 결국 모두 사람의 ‘일’이 되는 셈이다.

시인이 얘기한 행복은,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이다. 가령 나무가 잎도 열매도 다 버리듯이, 사람 또한 그럴 수 있다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을 다 버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정도로 행복할 수 없을 것임이 자명하다. 나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메마른 몸으로 서 있는 모습은, 시인이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권하고 있음직한 ‘신외무물(身外無物)’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외무물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한 내 육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다.

시인은 눈[雪]으로 인하여 바뀌는 세상을 마주하는 것을 행운이라고 하였다. 산에는 잎을 다 지운 나무도 있지만 잎을 지우지 않는 나무 역시 있으므로, 눈으로 인해 바뀌는 정도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산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도 있고 언덕도 있어, 이들 전체가 보여주는 광경은 눈이라는 단조로운 기상 현상에 비해 변화의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감상하는 것 자체를 하나의 행운으로 간주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다만 이 시에서 언급한 행운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이 얘기한 행운은 달리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변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행운을 마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행운이 되어줄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행운이 되어주고 내 스스로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시인이 화두로 제시한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리는 것이 되니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를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에 적용시켜보면 어떨까? 이른바 위정자들이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변화를 향해 나아간다면 국민들 누가 싫어할 수 있겠는가? 추함을 드러내는 쪽으로 정치를 끌고 갈 뿐이라면 국민들 누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명백한 것조차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정자로 둔 국민들만큼 불행한 사람들도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덕담을 건넬 때 행복이나 행운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많이 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또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은 토끼풀 밭을 헤집고 다니며 찾아 헤매고는 했을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어디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행운을 찾는다면서 행복이랄 수 있는 터를 짓밟으며 다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분들에게는 이 시가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 그분들은 적어도 행운이란 시인이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시시하지는 않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시시하게 보이는 행운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행운의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볍다고 결코 타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분들이 혹시라도 행운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한다면 역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역자는 5연 14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칠언 2구에 이어 오언 2구, 다시 칠언 2구로 구성된 고체시로 한역하였다. 칠언과 오언이 섞이기는 했지만 모두 짝수 구 끝에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棄(기)’·‘位(위)’·‘異(이)’가 된다.

2021. 12. 28.<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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