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5·18광주진압작전 건의문서에 '굿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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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아이디어 발언 전두환 확실…선배 장성들도 각하라 불러"
5·18규명위 2주년 보고회…'진돗개 하나' 공수부대에도 하달1980년 5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른바 충정작전이라 불린 광주진압작전을 건의한 문서에 'Good Idea'(굿 아이디어)라고 발언한 사실이 공식 조사 결과 확인됐다.아울러 당시 '진돗개 하나' 발령 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 이하 위원회)는 27일 출범 2주년 기념 대국민 보고회를 온라인으로 열고 이런 내용이 포함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발포명령 체계의 실체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위권 발동과 광주진압작전 관여 사실을 밝혀가고 있다"면서 "군기록, 경찰기록 등에 대한 보다 정밀한 확인 분석을 통해 그동안 쟁점으로 남아 있던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 관여, 발포명령 체계의 실체를 확인해가고 있다"고 밝혔다.특히 위원회는 "2군사령부 작성 문건인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는 1980년 5월 23일 진종채 2군사령관이 충정작전(광주재진입작전)을 건의한 문서에 "'閣下(각하)께서 Good Idea'라고 발언한 사실이 기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각하'는 전두환이라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이다.
위원회 안길정 조사4과장은 '각하'가 전두환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의에 "이때 각하는 (1980년 5월 21일 다른 기록에) '전 각하'로 된 걸로 봐서 최규하(당시 대통령)가 아니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진압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 관여 사실은 '소요진압과 그 교훈', '5공 전사' 등을 통해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위원회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당시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특전사령관 등이 참석한 회의서류에 "전 각하 : '초병에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강조'"라고 기록돼 있다.
송선태 위원장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보다 군의 선배들이 후배 장군에게 '각하'라 부를 수 있느냐는 상식적 의문이 있었는데 당시 대부분 장성들이 12·12 이후 모두 전두환을 각하라고 불렀다는 진술이 있다"고 말했다.위원회는 "이런 사실이 광주진압작전의 최종·실질적 승인권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대다수 국민의 추정적 의혹 수준을 넘어 움직일 수 없는 결정적 증거에 이를 수 있도록 내년 5월까지 역사적 진실에 준하는 추가 조사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또한 위원회는 1980년 5월 21일 '진돗개 하나' 발령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도 새롭게 찾아낸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그동안 3, 7, 11공수여단의 어떤 자료에도 이날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전남도경찰국, 1980)에 전남 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예비군 제외)됐다는 사실을 제7공수여단 작전상황실에 파견됐던 (경찰)연락관 양00 주임이 입수했다'고 기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실탄분배와 발포가 허용되는데 3, 7, 11공수여단과 20사단 등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어떠한 자료에도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사실은 기록돼 있지 않다.
위원회는 "기록누락의 사유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계엄군의 비무장 민간인 살상 내용도 구체적으로 추가로 확인됐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께 도청 앞 집단 발포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 저격수로 배치되었던 제11공수 여단 한모 일병은 자신이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던 청년을 조준하여 저격한 사실을 인정했으며, 피해자는 민간인 조 모 씨로 확인됐다.
이어 5월 27일 회사에서 숙직하고 밖을 내다보던 민간인 오 모 씨를 20사단 소속 조모 병사가 저격해 사살하고, 건물 밖으로 떨어진 시체를 공용터미널로 옮겼다는 복수의 계엄군 진술도 위원회는 확보했다.
피해자 조 모 씨는 지금까지 유탄에 피격·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과정에서 진상이 새로 규명됐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그동안 쟁점 중 하나였던 나주 금성동 파출소의 무기 피탈 시간은 1980년 5월 21일 정오가 아니라 계엄군 발포(오후 1시) 이후인 오후 2시께로 확인됐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이는 시민군 선제 발포설을 무력화할 만한 사실로 평가된다.위원회는 "가담자들의 수사 공판기록, 당시 경찰기록, 군 상황일지 등을 통해 확인하고 있으며 오후 1시 이전에 무기가 탈취된 무기고가 있는지 계속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북한군의 광주침투 주장이 허위라는 증거도 추가로 확인됐다.위원회는 "올해 탈북자 12명을 조사대상자로 선정, 대면조사를 했다면서 "그동안 자신이 직접 광주에 침투하였다고 주장해 온 정모 씨에 대한 진술 조사에서 '1980년 당시 자신은 광주가 아닌 평양에 있었으며, 그동안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라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5·18규명위 2주년 보고회…'진돗개 하나' 공수부대에도 하달1980년 5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른바 충정작전이라 불린 광주진압작전을 건의한 문서에 'Good Idea'(굿 아이디어)라고 발언한 사실이 공식 조사 결과 확인됐다.아울러 당시 '진돗개 하나' 발령 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 이하 위원회)는 27일 출범 2주년 기념 대국민 보고회를 온라인으로 열고 이런 내용이 포함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발포명령 체계의 실체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위권 발동과 광주진압작전 관여 사실을 밝혀가고 있다"면서 "군기록, 경찰기록 등에 대한 보다 정밀한 확인 분석을 통해 그동안 쟁점으로 남아 있던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 관여, 발포명령 체계의 실체를 확인해가고 있다"고 밝혔다.특히 위원회는 "2군사령부 작성 문건인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는 1980년 5월 23일 진종채 2군사령관이 충정작전(광주재진입작전)을 건의한 문서에 "'閣下(각하)께서 Good Idea'라고 발언한 사실이 기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각하'는 전두환이라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이다.
위원회 안길정 조사4과장은 '각하'가 전두환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의에 "이때 각하는 (1980년 5월 21일 다른 기록에) '전 각하'로 된 걸로 봐서 최규하(당시 대통령)가 아니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진압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 관여 사실은 '소요진압과 그 교훈', '5공 전사' 등을 통해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위원회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당시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특전사령관 등이 참석한 회의서류에 "전 각하 : '초병에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강조'"라고 기록돼 있다.
송선태 위원장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보다 군의 선배들이 후배 장군에게 '각하'라 부를 수 있느냐는 상식적 의문이 있었는데 당시 대부분 장성들이 12·12 이후 모두 전두환을 각하라고 불렀다는 진술이 있다"고 말했다.위원회는 "이런 사실이 광주진압작전의 최종·실질적 승인권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대다수 국민의 추정적 의혹 수준을 넘어 움직일 수 없는 결정적 증거에 이를 수 있도록 내년 5월까지 역사적 진실에 준하는 추가 조사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또한 위원회는 1980년 5월 21일 '진돗개 하나' 발령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도 새롭게 찾아낸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그동안 3, 7, 11공수여단의 어떤 자료에도 이날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전남도경찰국, 1980)에 전남 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예비군 제외)됐다는 사실을 제7공수여단 작전상황실에 파견됐던 (경찰)연락관 양00 주임이 입수했다'고 기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실탄분배와 발포가 허용되는데 3, 7, 11공수여단과 20사단 등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어떠한 자료에도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사실은 기록돼 있지 않다.
위원회는 "기록누락의 사유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계엄군의 비무장 민간인 살상 내용도 구체적으로 추가로 확인됐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께 도청 앞 집단 발포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 저격수로 배치되었던 제11공수 여단 한모 일병은 자신이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던 청년을 조준하여 저격한 사실을 인정했으며, 피해자는 민간인 조 모 씨로 확인됐다.
이어 5월 27일 회사에서 숙직하고 밖을 내다보던 민간인 오 모 씨를 20사단 소속 조모 병사가 저격해 사살하고, 건물 밖으로 떨어진 시체를 공용터미널로 옮겼다는 복수의 계엄군 진술도 위원회는 확보했다.
피해자 조 모 씨는 지금까지 유탄에 피격·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과정에서 진상이 새로 규명됐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그동안 쟁점 중 하나였던 나주 금성동 파출소의 무기 피탈 시간은 1980년 5월 21일 정오가 아니라 계엄군 발포(오후 1시) 이후인 오후 2시께로 확인됐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이는 시민군 선제 발포설을 무력화할 만한 사실로 평가된다.위원회는 "가담자들의 수사 공판기록, 당시 경찰기록, 군 상황일지 등을 통해 확인하고 있으며 오후 1시 이전에 무기가 탈취된 무기고가 있는지 계속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북한군의 광주침투 주장이 허위라는 증거도 추가로 확인됐다.위원회는 "올해 탈북자 12명을 조사대상자로 선정, 대면조사를 했다면서 "그동안 자신이 직접 광주에 침투하였다고 주장해 온 정모 씨에 대한 진술 조사에서 '1980년 당시 자신은 광주가 아닌 평양에 있었으며, 그동안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라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