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소박한 밥을 먹자

신년 에세이 - 장석주 시인

지난해 팬데믹 질병에
지지 않고 잘 버텼다

새해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은
심장이 힘차게 뛰고
맥박은 가지런하다는 점

뼛속까지 파고드는 절망으로
울부짖는 일 사라지고
그저 방긋방긋 웃을 일만
많으면 좋겠다
김정수 ‘진달래-축복’
지난해 팬데믹 질병에 지지 않고 잘 버텼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은 건 대견한 일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무릎 연골은 심하게 닳지 않고, 생각이 꽉 막힌 공무원을 상대로 논쟁을 하느라 골치가 썩었지만 몇 리터나 되는 피를 고스란히 간수한 채 한 해를 건너왔으니, 행운이라고 해야겠다. 새해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은 심장이 힘차게 뛰고 맥박은 가지런하다는 점과 여전히 아프지 않고 늠름하게 살아 있다는 거다. 오래된 고목 속 꿀로 가득 찬 벌집을 찾아낸 곰처럼 나는 살아 있는 게 자랑스럽다. 새해엔 슬픔은 줄고 기쁨이 늘면 좋겠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절망으로 울부짖는 일은 사라지고 그저 방긋방긋 웃을 일만 많으면 좋겠다. 웃음은 기쁨과 행복의 징표이고, 살아 있는 자만 누리는 특권이다. 나는 당신의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

먹는 건 우리 자신을 빚는 일

올해도 아름답고 조용한 봄이 오면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일제히 싹을 틔우고, 모란과 작약은 둥근 꽃봉오리를 맺을 테지. 동박새는 오리나무 가지 위에서 노래하고, 작은 뱀들은 풀밭에서 배를 밀며 기어가겠지. 버드나무 가지에 잎이 돋아 푸르러지고 덩굴은 무성하게 뻗어나가겠지. 여름엔 태양이 달궈진 쇠처럼 뜨거워지겠지. 아, 우린 뜨거운 이마를 식히고 갈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 익은 수박을 골라 쩍, 하고 가르겠지. 우리 앞에 배를 가른 채 붉은 속살에 까만 씨앗들이 촘촘히 박힌 제 속을 드러낸 이 물의 보석상자를 여름 끝날 때까지 탐하겠지. 가을이 오면 대추나무엔 대추 열매들이 붉고 둥글게 여물고, 석류 열매는 이마가 깨져서 홍보석 같은 알맹이를 고스란히 세상에 드러내겠지. 겨울밤엔 먼 숲에서 올빼미가 울고, 길고양이들은 잠잘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겠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정해지고, 동생들의 웃음소리는 더 맑게 울려 퍼지겠지. 그러니 새해엔 누구도 슬픔과 절망 때문에 몸부림을 치거나 한 끼라도 걸러서 곯은 배를 부여잡고 잠드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먹는 걸 빼놓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건 어렵다. 먹는 건 무엇보다 앞선 사람의 본능이고, 동시에 우리가 먹는 건 우리 자신을 빚는 일이다. 음식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삶에의 의지나 의욕도 고갈된 것이다. 배고픔과 삶에의 의지는 대체로 비례한다. 잘 먹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다. 밥은 생물학적 생존에 필요한 기본 조건이다. 새해엔 소박한 밥을 먹었으면 한다. 이 말은 두 가지 뜻을 포괄한다. 밥벌이의 소박함과 밥상의 소박함이 그것이다. 밥벌이의 소박함은 밥이 내 입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 절차와 수단의 정직함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남을 등쳐서 얻은 이익이나 뇌물 같이 부정한 방식으로 얻은 재화에 기대는 밥벌이는 비루하다. 그건 우리 숨결에 나는 냄새를 따라 우리 주위에서 앵앵거리며 결국은 남의 피를 빨며 생명을 연명하는 모기 같이 비겁하고 더러운 짓이다.

밥벌이의 소박함, 밥상의 소박함

우리가 먹는 밥은 곧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무엇을 먹는가는 곧 우리 정체성과 도덕성을 증언한다는 뜻이다. 식사는 신성한 의례일 것이다. 인류는 음식을 차리고 먹으며 생일과 결혼과 장례의 의식을 치른다. 특별한 날들엔 더 좋은 그릇을 꺼내고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내놓는다. 그건 음식이 “개인과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요소”(미셸 퓌에슈)인 까닭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미각의 만족을 위해 먹는다. 먹는 건 사회적 의례를 넘어서는 생태적인 행위다. 맛있는 음식은 우리 미각에 감각의 파장을 만든다. 새로운 요리나 이국 음식의 맛이 일으키는 미각의 흥분을 느끼며 그 진경에 푹 빠지자. 그러면 사는 게 조금 더 풍부해지고 즐거워진다.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저 평안북도 정주 태생인 시인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고 모던보이였다. 그렇건만 그는 토속적인 삶의 정취와 함께 다양한 북방 방언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맛깔나게 구사하는 서정시를 썼다. 시에 남은 미각의 흔적을 추적해보면 그의 입맛이 소박하고 예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콩밥에 가지냉국, 도토리묵과 명태 창난젓, 인절미와 달송편, 두부산적과 시래깃국을, 한겨울의 동치미 국물과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그는 즐겨 먹었다. 그의 미각은 평북 토박이의 여러 음식들에 두루 뻗치는데, 그만큼 미각이 저 북방의 토박이 음식문화와 제 고장의 정취에 특화되어 있는 증거인 셈이다. 이런 밥상은 어떤가? 백석이 쓴 ‘선우사(膳友辭)-함주시초(咸州詩抄) 4’의 밥상을 들여다보자.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쓸쓸한 저녁을 먹는다//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착하디 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우리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이건 쓸쓸한 저녁에 받은 소박한 밥상이다. 그는 왜 쓸쓸한가? 외롭고 쓸쓸함은 백석 시의 주조음이다. 나조반 밥상을 받은 겨울 저녁에 싸락눈이 싸락싸락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조반에 고즈넉하게 올린 흰밥과 가재미와 시인은 친구다. 먹는 주체와 먹는 대상은 한 몸이다. 흰밥이 그렇듯이 가자미도 겉과 속이 흰 생선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라는 구절에 따르면 흰색 음식에 대한 선호는 때가 덜 탄 순수한 것에 끌리는 마음을 드러낸다. 시인은 흰색 일색인 소박한 상차림에 감동을 해서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했다. 가난하지만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그의 착한 심성은 감출 수가 없다. 가난해도 서럽지 않은 건 늘 욕심이 없기에 가능하다. 그는 소박하고 정갈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 욕심 없음이 간소하게 차린 밥상에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다.세상 풍파를 다 겪고 돌아온 탕자는 어머니가 차린 소박한 밥상을 받고 울컥 감동을 받는다. 어머니가 밥상에 올린 건 수저와 젓가락, 된장을 풀어 끓인 배춧국과 흰 쌀밥, 김치 한 보시기와 작은 종지에 담긴 간장이 전부다. 그건 가난한 어머니의 최선이다. 탕자는 뜨거운 배춧국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팔다리는 노곤해지고 가슴엔 벅찬 슬픔이 가득 밀려오는 것이다. 어머니는 괜찮다, 괜찮다, 라고 말한다. 새해엔 정직한 노동으로 땀 흘리고 번 밥을 먹자. 나와 꽃같이 어여쁜 어린 자식들이 공정과 상식에 어긋나지 않은 방식으로 얻은 소박한 밥상에 즐거움을 느낀다면 좋겠다.

탐욕은 쉬고 기쁨은 나누고…

참된 삶은 늘 소박한 밥상에 잇대인 삶이다. 참된 삶을 일구는 데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탐욕에 물든 손은 쉬게 하자. 새해엔 제 잇속을 챙기느라 허겁지겁 하지 말고, 부디 굶주린 쥐떼처럼 몰려다니지 말자. 남의 것은 남의 것, 내 것은 내 것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도 말자. 바른 인격으로 내 몫의 소득을 취하고, 내 안에 사는 여린 동물들이 즐거워하는 삶을 누리자. 슬픔은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자. 다만 기쁨은 나누고, 그 기쁨이 커져 세상에 넘치도록 부지런히 풀무질을 하자. 메리 올리버는 ‘기러기’란 시에서 우리가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라고 말한다. 애써 착해지려는 강박증은 우리 몸과 마음을 옥죈다. 올해는 공정과 상식을 지키며 딱 우리가 가진 품성만큼만 착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