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예일대의 아프리카 비전

정갑영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jeongky@unicef.or.kr
해가 바뀌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흘러가는 세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카이로스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아무런 실질적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긴 호흡으로 미래를 새롭게 그려보는 계기도 갖게 된다. 특히 오늘 같은 새해 첫 출근길에는 새로운 소망이 화제가 되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 웅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청년들은 ‘헬조선’을 극복할 꿈을 그려보고, 나라와 기업도 미래를 향한 전략을 가다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감명 깊었던 글로벌 리더의 비전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피터 샐러비 예일대 총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예일 아프리카 이니셔티브(Yale Africa Initiative· YAI)’가 바로 그것이다.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이 아프리카로 외연을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현지 고교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지역 대학과의 교류와 여성 지도자의 역량 증진을 위한 파트너십 등을 구축하겠다는 내용이다. 차세대 지도자 육성을 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예일이 낙후된 소외 지역인 아프리카에 리더십과 포용력을 발휘하겠다는 것이다. 취임 당일의 만찬 행사까지도 아프리카 밤으로 성대하게 치르며 예일의 아프리카 비전을 세계에 여실히 보여줬다.어느 대학이 감히 미래의 보고인 아프리카와의 교류 확대를 역점 사업으로 들고나올 수 있을까. 한국 대학의 총장이 이런 전략을 제시했다면 어떤 시선을 받았을까. 당시 현직 총장으로 취임식에 참석한 필자에게는 YAI가 무척 놀랍고 신선하며, 큰 감동으로 이어졌다. 세계 명문이 척박한 아프리카에 고등교육을 통해 자선을 베풀고,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는 지도자를 육성하겠다는 다짐이다. 샐러비 총장은 세계의 지성 사회에 아프리카라는 새로운 프런티어를 제시해 개척과 자선의 문화를 일깨우고, 청년들에게는 도전과 봉사의 정신을 자극해 글로벌 리더로서의 품격을 갖게 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몇십 년을 앞서가는 미래의 통찰력이 없이는 상상하기 힘든 비전이다.

당시 취임식은 행사 자체로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20년 만에 총장이 바뀌어 행사를 진행할 담당자조차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부터, 320여 개 대학에서 초청된 총장들이 학교의 창립연도 순서대로 대학 고유의 가운을 걸치고 행진하는 장면도 장관이었다. 예일대의 상징인 개를 키우는 시민들을 총장공관에 개와 함께 초청하는 행사도 미국 문화의 운치를 맛보게 했다.

역사는 때로 갈 지(之)자처럼 헤매거나 후퇴할 때도 있지만, 결국은 꿈과 비전을 가진 개척자의 소망대로 이뤄진다. 130여 년 전 양귀(洋鬼)라고 비난받으며 한국에 최초로 대학을 세운 선교사들도 처음 시작은 YAI와 같은 비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새해 모두 더 멀리, 더 넓게 세상을 포용하는 비전을 가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