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추사는 수선화를 왜 그리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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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水仙花)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 김정희(1786~1856) :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 혹한 속에 수선화가 피었습니다. 제주 한림공원에는 수십만 송이나 피었습니다. 제주에 자생하는 ‘제주수선화’보다 하얀 꽃받침에 금빛 망울을 올린 ‘금잔옥대 수선화’가 더 많군요. 눈발 속에서 여린 꽃잎을 피웠으니 설중화(雪中花)라 할 만합니다. 똑같이 눈 속에 피는 꽃이지만 매화나 동백과 달리 몸체가 가녀려서 더욱 마음이 끌립니다.
그가 수선화를 처음 본 것은 24세 때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이 꽃의 청순미에 매료됐다고 해요. 43세 때에는 평안감사인 아버지를 만나러 평양에 들렀다가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달라고 해서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선물했습니다.
다산은 감탄하며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며 놀란다…’는 시로 화답했지요. 추사는 이로부터 10여 년 뒤 유배지 제주에 닿았는데, 놀랍게도 수선화가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수선화를 보고는 감격해서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를 썼죠.
“수선화는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산과 들, 밭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수선화의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입니다.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했죠. 소년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 빠져 죽은 자리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꽃말이 ‘자아도취’ 또는 ‘자기애’이지요. ‘나르시시즘’도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르키소스 신화는 수많은 이야기로 변주됐죠. 그중에서도 오스카 와일드가 각색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요정들이 찾아와 호수를 위로했죠. 그러자 호수는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아니, 그대만큼 잘 아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호수는 한참 뒤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아름다운지는 몰랐어요. 저는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만 보았거든요.”
나르키소스와 호수가 서로 ‘자기만’ 생각했다는 거죠. 그만큼 서로 외로운 존재였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너무 지나쳐 자기밖에 모르는 지경이 되면 ‘자기애적 인격 장애’에 빠진다고 분석했지요.
수선화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구근식물이어서 뿌리로만 번식하지요. 아무리 꽃이 고와도 꽃가루받이를 못하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선화는 참 외로운 꽃입니다. 씨앗 하나 남기지 못하고 땅속줄기로만 후세를 이어가야 하니 외로움이 끝도 없지요.
180년 전 추사의 심정이 그랬을지 모릅니다. 깊은 고독을 견디는 땅속뿌리의 자세로 그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고,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추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따뜻하게 달래 준 것이 수선화였으니, 둘은 한 몸에서 난 꽃과 뿌리인 셈이지요.
조금 있으면 제주뿐만 아니라 남부지방 곳곳에 수선화가 만발할 것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우리 마음의 밭에도 꽃 향이 묻어나겠지요. 그 향기 속에는 우리도 모르는 자기애의 얼룩과 세속의 먼지들이 함께 묻어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수선화 꽃잎에 눈을 맞춰 봅니다. 그해 겨울 눈 속의 수선화로 시를 읊는 추사의 모습과 올겨울 눈 속의 수선화로 새 거울을 삼는 제 모습을 그 위로 천천히 겹쳐 봅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 김정희(1786~1856) :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 혹한 속에 수선화가 피었습니다. 제주 한림공원에는 수십만 송이나 피었습니다. 제주에 자생하는 ‘제주수선화’보다 하얀 꽃받침에 금빛 망울을 올린 ‘금잔옥대 수선화’가 더 많군요. 눈발 속에서 여린 꽃잎을 피웠으니 설중화(雪中花)라 할 만합니다. 똑같이 눈 속에 피는 꽃이지만 매화나 동백과 달리 몸체가 가녀려서 더욱 마음이 끌립니다.
8년 넘는 유배생활의 반려식물
추사 김정희가 유배 살던 대정읍 일대에도 수선화가 만발했습니다. 대정향교에서 안덕 계곡까지 이어지는 추사유배길 또한 길쭉한 수선화밭으로 변했지요. 추사는 54세 때인 1840년 이곳에 와 8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그 외로운 적소의 밤을 함께 보내고, 간난의 시간을 함께 견딘 꽃이 수선화였죠. 그는 수선화를 워낙 좋아해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문집에 담긴 시 ‘수선화(水仙花)’에서는 ‘해탈신선’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죠.그가 수선화를 처음 본 것은 24세 때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이 꽃의 청순미에 매료됐다고 해요. 43세 때에는 평안감사인 아버지를 만나러 평양에 들렀다가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달라고 해서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선물했습니다.
다산은 감탄하며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며 놀란다…’는 시로 화답했지요. 추사는 이로부터 10여 년 뒤 유배지 제주에 닿았는데, 놀랍게도 수선화가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수선화를 보고는 감격해서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를 썼죠.
“수선화는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산과 들, 밭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꽃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니 안쓰러워
그러나 농부들이 소와 말 먹이로 쓰거나 보리밭을 해친다며 파내어 버리는 걸 보고는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마구잡이로 버려지는 수선화를 보면서 그는 절해고도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을 겁니다. “꽃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안쓰럽다”고 한탄한 것도 이런 까닭이겠지요.수선화의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입니다.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했죠. 소년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 빠져 죽은 자리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꽃말이 ‘자아도취’ 또는 ‘자기애’이지요. ‘나르시시즘’도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르키소스 신화는 수많은 이야기로 변주됐죠. 그중에서도 오스카 와일드가 각색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요정들이 찾아와 호수를 위로했죠. 그러자 호수는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아니, 그대만큼 잘 아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호수는 한참 뒤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아름다운지는 몰랐어요. 저는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만 보았거든요.”
나르키소스와 호수가 서로 ‘자기만’ 생각했다는 거죠. 그만큼 서로 외로운 존재였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너무 지나쳐 자기밖에 모르는 지경이 되면 ‘자기애적 인격 장애’에 빠진다고 분석했지요.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흥미로운 건 나르키소스가 병명뿐만 아니라 약 이름으로도 쓰였다는 점입니다. 수선화의 어원인 ‘나르코’에서 진통제나 마취약을 뜻하는 나르코틱스(narcotics)가 나왔죠. 진통연고와 나르키소스유(油)도 오랫동안 쓰였습니다. 동양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을 천선(天仙), 땅에 있는 것을 지선(地仙), 물에 있는 것을 수선(水仙)이라 부르며 신선한 약으로 활용했지요.수선화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구근식물이어서 뿌리로만 번식하지요. 아무리 꽃이 고와도 꽃가루받이를 못하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선화는 참 외로운 꽃입니다. 씨앗 하나 남기지 못하고 땅속줄기로만 후세를 이어가야 하니 외로움이 끝도 없지요.
180년 전 추사의 심정이 그랬을지 모릅니다. 깊은 고독을 견디는 땅속뿌리의 자세로 그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고,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추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따뜻하게 달래 준 것이 수선화였으니, 둘은 한 몸에서 난 꽃과 뿌리인 셈이지요.
조금 있으면 제주뿐만 아니라 남부지방 곳곳에 수선화가 만발할 것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우리 마음의 밭에도 꽃 향이 묻어나겠지요. 그 향기 속에는 우리도 모르는 자기애의 얼룩과 세속의 먼지들이 함께 묻어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수선화 꽃잎에 눈을 맞춰 봅니다. 그해 겨울 눈 속의 수선화로 시를 읊는 추사의 모습과 올겨울 눈 속의 수선화로 새 거울을 삼는 제 모습을 그 위로 천천히 겹쳐 봅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