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에 밀린 터키 리라화의 굴욕
입력
수정
지면A10
인플레 역행한 저금리 정책에터키인들이 글로벌 암호화폐 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터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터키인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암호화폐가 ‘안전자산’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등 시장에 역행하는 정책을 펼친 결과다.
리라화 가치 40% 폭락하자
"암호화폐가 더 안전하다"
1년 반만에 거래액 73배 폭증
법정화폐 채택한 엘살바도르
비트코인 투자 손실률 14%
○“리라화에 비하면 암호화폐는 안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블록체인 정보업체 체인앨리시스를 인용해 바이낸스 등 3개 암호화폐거래소에서 작년 12월 마지막 1주일간 리라화로 암호화폐를 거래한 액수가 124억달러(약 14조7300억원)를 기록했다고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20년 6월 초 1주일간 거래액(1억7000만달러)과 비교하면 1년6개월 만에 73배가량 불어났다.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지난해 9월 이후 40% 폭락하는 등 변동성이 극심해졌다. 터키인 사이에서는 차라리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 안전한 ‘가치 저장소’라는 인식이 확대됐다. 터키 암호화폐거래소 비틀로의 에스라 알페이 최고마케팅책임자는 “터키인들은 암호화폐를 장기적으로는 투자자산, 단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 헤지(위험 회피)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터키인들은 미 달러에 가치를 고정해 변동성을 낮춘 스테이블코인을 쓸어담고 있다. 암호화폐 데이터 제공업체 크립토컴페어에 따르면 지난해 말 한때 스테이블코인 테더 거래에서 리라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육박했다. 달러, 유로화로 테더를 거래하는 금액을 크게 웃돌았다. 터키 정부가 지난해 자국에서 암호화폐를 결제 수단으로 쓰지 못하도록 했지만 터키인의 암호화폐 ‘사랑’에 제동을 걸지는 못했다.
○경제정책 불신으로 암호화폐 선호
리라화가 암호화폐보다 위험한 자산으로 추락한 배경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있다. 그는 기준금리를 인하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특이한’ 경제 철학을 갖고 있다. 미 중앙은행(Fed)을 비롯한 세계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고려하는 ‘상식’과는 정반대다. 그는 금리 인상이 ‘만악의 부모’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저금리를 유지해야 고성장할 수 있고 2023년 대선에서 자신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기대 때문이다.터키의 지난해 12월 물가상승률은 36%로 1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같은 달 터키 중앙은행은 4개월 연속 기준금리를 낮췄다. 지난해 9월 연 19%이던 기준금리는 연 14%로 낮아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중앙은행 총재를 연달아 해임한 결과다.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에너지 수입가격이 급등하는 등 부작용이 잇따르면서 터키 정부는 여러 환율 방어 수단을 검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달러, 유로화 등 외화예금을 리라화로 강제 전환하라는 지시를 은행에 내릴 가능성까지 우려하고 있다.WSJ는 경제 정책에 대한 불신이 큰 터키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국민 사이에서 암호화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암호화폐에 투자했다고 승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엘살바도르는 국가 예산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현재 14%의 손실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달러 표시 엘살바도르 국채 가격이 급락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