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현대삼호重 팔아라" 어깃장…3년 공들인 '조선 빅딜'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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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기업결합 최종 불허“합병을 원하면 두 회사 중 한 곳의 LNG선 사업부문을 매각해야 한다.”
EU "합병사 LNG선 점유율 50% 이하로" 무리한 요구
수용땐 합병 실익 없어…조선 '빅3' 다시 과열경쟁 우려
현대重 "中·日과도 경쟁…점유율 높다고 독점은 아냐"
지난해 현대중공업그룹은 대우조선해양과의 기업결합(합병)을 심사하는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이런 요구를 전달받았다. 현대중공업그룹이 합병을 승인받고 싶다면 한 회사의 LNG선 사업부문을 매각해 시장 점유율을 50% 이하로 낮추라는 것이었다.현대중공업그룹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50% 이하로 낮추려면 이제 막 인수한 대우조선의 LNG선 사업을 바로 떼어내 팔든지, 현대가 보유한 울산(현대중공업)과 영암(현대삼호중공업) 두 곳의 조선소 중 한 곳을 매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조선소에 LNG선 관련 기술을 이전하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EU 경쟁당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3년을 끌어온 조선업 ‘빅딜’이 EU 경쟁당국의 불승인 결정으로 무산된 배경이다.
○韓 조선업 ‘고질병’ 과당경쟁 그대로
2019년 3월 이뤄진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합병 결정은 한국 조선산업의 구조 개편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현대중공업그룹,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소위 ‘빅3’의 과당경쟁을 해소하는 한편, 낮은 인건비로 무장한 중국 조선업체의 공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국내 조선산업은 2015년을 전후로 이뤄진 중국 조선업체들의 저가 수주 공세, 해양플랜트 설계 부실로 인한 대규모 손실 발생 등 악재가 중첩되며 줄도산 위기에 빠졌다. 현대중공업그룹도 2016년 대대적 구조조정에 나섰고, 군산 조선소 가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자금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2015년 채권단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앞세워 사실상 정부 주도의 합병이 결정됐지만 세계 1, 4위 조선업체 간의 통합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았다. 인수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선박 발주사가 있는 주요 국가 경쟁당국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현대중공업그룹은 6개국에 기업결합심사를 신청했다. 이 중 중국, 싱가포르, 카자흐스탄으로부턴 조건 없는 승인을 받았다. 남은 국가는 EU와 한국, 일본이었다. 해당국 승인이 없더라도 그 국가로부터 수주를 받지 못할 뿐 원칙적으로 합병은 가능하다. 하지만 현대중공업그룹과 산은은 인수 본계약을 체결하면서 6개국 승인을 모두 받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EU의 불승인 결정이 합병 무산으로 귀결된 이유다.
○LNG선 최고 기술력이 되레 ‘발목’
EU 경쟁당국은 LNG운반선 분야에서 양사의 시장 지배력이 일방적인 신조선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불승인 이유로 꼽았다. 두 회사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선 83척 가운데 57%인 47척을 수주했다. EU가 별도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EU 내 대형 선사들이 발주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등 고부가가치 선종의 시장 점유율 역시 각각 30%, 50%대에 이른다.조선업계 관계자는 “최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컨테이너선이나 탱커에도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이중연료추진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한국 조선소들의 입지가 더 강화됐다”며 “유럽 선사들로선 초대형 조선소의 탄생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합병이 무산되면서 한국 조선산업은 다시 치열한 내부 경쟁으로 내몰리게 됐다. ‘빅3’ 조선사의 주력 선종은 거의 차이가 없다. 자율운항, 암모니아·수소 등 차세대 연료 기반 선박 기술 개발을 두고 경쟁 중이다. 현대중공업그룹으로선 빠르게 추격해오는 중국 업체 견제를 위해 추진한 ‘규모의 경제’ 실현이 물거품이 됐다. 경남 거제에 있는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는 효율적인 야드 배치로 세계적으로도 생산성이 높은 조선소로 꼽힌다. 대우조선이 강점을 지닌 쇄빙선, 잠수함 등 특수선 분야를 흡수해 창출하려던 시너지 효과도 무산돼 버렸다.
현대중공업그룹 측은 “조선업은 입찰 승패에 따라 점유율이 크게 변동하는 산업”이라며 “단순히 높은 점유율만으로 섣불리 독과점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EU에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황정환/강경민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