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공처럼 쌓고, 폭죽처럼 터트리다···모리스 라벨[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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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 하나의 걸작을 썼다. 하지만 이 곡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뜻일까요.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을 걸작이라 평가하면서도 정작 음악은 없다고 하니 이해하기 힘들죠. 심지어 그는 이 곡의 초연 당시 관객들이 열띤 반응을 보이자 당황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한 노인이 연주를 듣다가 화를 내며 소리를 친 것을 보고, 그만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한 것이라 얘기하기도 했죠.
이 곡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음악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의 '볼레로'입니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밀정' 등에 나왔으며 다양한 광고 음악으로도 활용됐습니다.
원래 볼레로는 18세기에 생겨난 스페인 춤곡을 이르는데요. 그런 만큼 라벨의 '볼레로'도 무용 공연에 자주 사용됩니다. 이 곡을 배경으로 세 명의 안무가가 각자의 개성을 담은 춤을 선보인 국립현대무용단의 '쓰리 볼레로'도 무용 애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 처음엔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요. 약한 음량의 작은북과 팀파니 소리로 시작되기 때문이죠. 그러다 플루트, 클라리넷 등 다른 악기들의 소리가 하나둘씩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곡을 듣다보면 특정 멜로디와 리듬이 계속 반복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5분 정도 길이의 이 작품엔 두 개의 주제 선율만이 흐르고, 작은북의 특정 리듬이 169회에 걸쳐 반복되죠.
이쯤 되면 지루할 법도 한데요. 하지만 갈수록 흥미롭게 느껴지고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다양한 악기 소리가 더해지고 쌓이며 커다란 원을 그려나가는 기분이 들죠. 소리도 점점 커져 결말에 이르러선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폭죽이 팡팡 터지고 불꽃이 피어오른 것 같습니다. 라벨 스스로는 기존 음악들과 달리 같은 음과 리듬이 반복되는 이 곡에 '음악이 없다'라고 했지만, 실은 그 안에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음악을 펼쳐 보인 것이죠. 그는 '볼레로' 뿐만 아니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치간느' 등 다양한 매력을 가진 작품들을 선보였는데요. 그의 삶과 음악 세계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라벨은 스페인과 가까운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후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떠났지만, 이곳 출신인 어머니 덕분에 스페인 음악을 꾸준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볼레로'를 포함해 그의 음악에 스페인 음악의 특성이 강하게 배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죠.
라벨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실력을 크게 인정받진 못했습니다. 심지어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재차 제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이 음악원의 피아노과에 들어갔는데요. 교수들은 라벨의 독특한 음악적 색깔을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그는 결국 낙제를 거듭하다 제명됐습니다. 그러다 2년 후 다시 작곡과로 들어갔는데요. 이때도 비슷한 이유로 3년 만에 쫓겨났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갈 기회를 주는 '로마 대상'에서도 연이어 고배를 마셨습니다. 파리국립음악원 주최로 열리는 이 경연엔 음악원 출신 작곡가들이 대거 출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요. 라벨과 함께 프랑스 대표 인상주의 음악가로 꼽히는 클로드 아실 드뷔시를 비롯해 조르주 비제, 샤를 구노 등이 이 경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라벨은 이 경연에 총 다섯 번을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도전했을 때 2위까지 올랐던 것을 제외하곤 다 입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고, 음악원과 경연에서 잇달아 배제된 것을 보면 라벨의 실력에 의구심이 드는데요. 그러나 대중들의 귀와 마음은 이미 그의 음악에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음악원에서 마지막으로 쫓겨나기 전 만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호평을 받게 된 겁니다. '파반느'는 16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궁정 무곡으로, 템포가 느리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라벨의 파반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슬프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선사했죠.
그런데 이런 작품을 만든 라벨이 로마 대상에서 계속 고배를 마시자 많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급기야 정부가 감사에 나서고 음악원장이 교체되기까지 했죠. 결국 진정한 음악은 어떤 장벽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닿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이후 라벨은 승승장구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음악의 특색을 결합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선율을 선사했죠. 미국 스윙 음악의 영향도 받아 다양한 리듬도 만들어냈습니다.
'볼레로'를 포함해 그의 음악을 들으면 닫혀 있기 보다 자유분방한 느낌을 받는데요. 이는 그가 매우 치밀하고 정교하게 계산을 해 음을 배치하고 쌓아올린 덕분입니다.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를 "스위스 시계공 같은 작곡가"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라벨은 극심한 고통도 겪어야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그는 군수품을 옮기는 위험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도심에서 벗어나 홀로 시골에서 지내며 슬픔을 극복해 갔는데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볼레로'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단순한데 감각적이고, 반복적인데 다채로운 음악. 이런 묘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 탄생한 것은 어떤 상황에도 음악을 만들어 나갔던 그의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도 오늘 하루를 멋지고 신비로운 매력의 라벨 음악들로 가득 채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