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의 '절필 선언'에 대한 유감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사진=연합뉴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그가 쏘아 올린 작고 사소한 ‘멸공 조크’ 한마디에 절필까지 선언하고 말았다. 인스타그램은 왜 정 부회장의 글만 삭제했을까, 그래놓고 ‘시스템 오류’라는 한 마디 말로 복구한 건 또 뭔 ‘시츄에이션’일까 등 좀 더 파고들었어야 할 의문은 사라진 채 결국 정 부회장의 백기로 ‘멸공 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다.

이왕 정 부회장을 향해 '관종'이라는 비난까지 나왔으니, 그가 왜 작년 11월부터 ‘멸공’이란 단어에 서서히 집착하기 시작한 것인 지, 추론을 통한 변명 하나쯤 해봐도 좋을 듯 싶다. 처음의 멸공 발언은 농담이었다. 한 미국계 피자 프랜차이즈가 불우 이웃을 돕는 이벤트를 펼치자, 이를 돕자는 차원에서 “남 돕기 좋아하는(증명할 수는 없지만, 정 부회장을 아는 이들로부터 주워들은 평가다)” 정 부회장이 해당 피자의 로고가 박힌 모자와 소품을 착용했는데, 공교롭게도 온통 붉은 색이었다. 이때부터 ‘공산당이 싫어요’, ‘#멸공’ 등 일종의 놀이 같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후의 사건은 다들 아는 바다. 인스타그램의 일방적 삭제 조치와 복구,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정용진 저격’,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이마트 방문, 신세계 주가 폭락과 스타벅스 보이콧 VS 바이콧, 정 부회장의 사과와 절필 선언까지 불과 며칠 만에 폭풍처럼 사건들이 이어졌다.

왜 정 부회장은 자신이 던진 사소한 농담이 눈덩이처럼 커질 때 발을 빼지 않았을까. “농담이었어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면 쉽게 가라앉았을 법도 했는데 그는 오히려 ‘진지 모드’로 전환하고는 멸공에 ‘액센트’를 넣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의 답은 그의 태생과 연관돼 있을 법하다. 정 부회장은 굴지의 대기업 자제다. 태어날 때부터 소위 재벌의 삶을 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말과 의지가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한 일을 겪어본 일이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의 말과 글이 일방적으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삭제당했다. 화가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정 부회장의 인스타그램 집착과 연관돼 있다. 그가 SNS에 주로 사생활을 공개하는 터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 부회장은 지독한 일벌레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고 한다. 쿠팡, 네이버와 같은 전에 보지 못했던 강력한 경쟁자와 싸워 커머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에 몰두한다. 한때 그의 인스타그램 활동에 대해 신세계, 이마트, 쓱닷컴 등을 알리기 위한 브랜드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 부회장의 왕성한 SNS 행위를 의도된 전략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탈출구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 같다. 멸공 발언을 향한 십자포화 속에 정 부회장은 선택을 해야했을 지 모른다. 자신만의 ‘프라이빗 버블’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속절없이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때아닌 멸공 논란은 우리 사회의 ‘에코 체임버(메아리의 방)’ 효과가 얼마나 위험한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것 같다. 하버드 대학 법학 교수이자 오바마 행정부의 일원이기도 했던 캐스 선스타인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메아리가 되어서 자기들끼리의 말만 들으며, 견해가 점점 더 극단적인 쪽으로 고착되는 현상을 ‘반향실(echo chamber)’ 효과라고 불렀다. 요즘 자주 쓰이는 확증편향과도 비슷한 개념이다.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의 저자인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이 전통 미디어 시절에도 있기는 했지만 소셜 미디어가 사회의 극단적인 분절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예컨데 미국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GMO(유전자조작) 식품이 과학적으로 건강에 해롭지 않다고 합의돼 있지만, 여전히 GMO가 해롭다고 생각한다. 공화당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기후 온난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넥플릭스의 정치 풍자 영화인 ‘돈 룩 업’은 반향실 효과가 어떤 결과를 낳는 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정 부회장의 말 한마디에 대한 양측의 비난과 지지는 자신들만의 메아리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가 멸공 발언을 이용했을 뿐이다. 와중에 정 부회장은 말과 글의 자유를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정 부회장이 백기를 든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이마트 노조의 ‘정중한 비판’이었음은 나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노조가 “사업 먼저 돌아보라”고 하자, 정 부회장은 “제 부족”이라는 사과와 함께 절필을 선언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