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 된 '과거시험 답안지'..."창덕궁 병풍뒤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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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병풍 뒷면에서 1840년 과거시험 답안지가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6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보존처리를 진행한 일월오봉도 병풍의 틀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 27장이 배접(褙接·종이를 여러 겹 포개어 붙임)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다섯 개 봉우리, 소나무, 파도치는 물결을 화폭에 담은 궁중장식화다. 인정전은 창덕궁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이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에도 일월오봉도가 있었다.
인정전 어좌(御座·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설치된 일월오봉도는 4폭 병풍으로, 크기는 가로 436㎝·세로 241㎝다. 1964년 이후 다섯 차례 보수했으나, 화면이 일부 파손되거나 안료가 들뜨고 병풍 틀이 틀어졌다는 진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2016년 전면 해체하고 지난해까지 보존처리를 했다.
일월오봉도에서 나온 과거 시험 답안지는 탈락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했을 경우 응시자에게 시권을 돌려주고, 불합격한 사람들의 시권은 재활용했다.윤선영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에 수록된 논고에서 시험 과목과 문제가 확인되는 시권 2장을 분석해 1840년 시행된 식년감시초시(式年監試初試) 답안지라고 설명했다.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른 정기 시험이고, 감시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뜻한다.
윤 교수는 "시권의 글을 번역해 살펴본 결과 다섯 가지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 가운데 한 구절을 골라 대략적인 뜻을 물은 과목과 사서(四書) 중 의심이 가는 구절에 대해 질문한 과목의 답안지였다"며 "시권 27장 중 25장이 동일한 시험의 답안이었다"고 강조했다.이어 "식년시 응시자는 자비로 시지(試紙·과거 시험 종이)를 마련해야 했고, 권력 가문 자제들이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좋은 시지를 가져오는 폐습이 생기자 두꺼운 종이 지참을 금하도록 했다"며 "일월오봉도에 붙어 있던 1840년 즈음의 시권은 대부분 두껍지 않고 고급 품질 종이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재활용한 사례는 적지 않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 특별전에서 선보인 전통 예복 '활옷' 속에서도 188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바 있다.
윤 교수는 "왕실에서조차 시권을 재활용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 종이 물자가 매우 부족했던 듯하다"며 "시권을 수집해 재활용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을 고려하면 인정전 일월오봉도 병풍은 184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시권 외에도 1960년대 신문지가 보존처리에 활용됐고, 조선시대 병풍 틀이 지금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센터는 보존처리 과정에서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경복궁과 덕수궁 일월오봉도 사진 등을 근거로 녹색 구름무늬 비단에 꽃문양 금박을 붙여 장황했다. 장황은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책이나 화첩을 만드는 행위다.
보고서에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과정을 소개한 글과 사진 외에도 '인정전 일월오봉도 변형과 전통 장황에 대한 고증', '인정전 일월오봉도의 과학적 분석'에 관한 논고가 실렸다.(사진=연합뉴스)
김현경기자 khkkim@wowtv.co.kr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6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보존처리를 진행한 일월오봉도 병풍의 틀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 27장이 배접(褙接·종이를 여러 겹 포개어 붙임)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다섯 개 봉우리, 소나무, 파도치는 물결을 화폭에 담은 궁중장식화다. 인정전은 창덕궁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이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에도 일월오봉도가 있었다.
인정전 어좌(御座·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설치된 일월오봉도는 4폭 병풍으로, 크기는 가로 436㎝·세로 241㎝다. 1964년 이후 다섯 차례 보수했으나, 화면이 일부 파손되거나 안료가 들뜨고 병풍 틀이 틀어졌다는 진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2016년 전면 해체하고 지난해까지 보존처리를 했다.
일월오봉도에서 나온 과거 시험 답안지는 탈락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했을 경우 응시자에게 시권을 돌려주고, 불합격한 사람들의 시권은 재활용했다.윤선영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에 수록된 논고에서 시험 과목과 문제가 확인되는 시권 2장을 분석해 1840년 시행된 식년감시초시(式年監試初試) 답안지라고 설명했다.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른 정기 시험이고, 감시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뜻한다.
윤 교수는 "시권의 글을 번역해 살펴본 결과 다섯 가지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 가운데 한 구절을 골라 대략적인 뜻을 물은 과목과 사서(四書) 중 의심이 가는 구절에 대해 질문한 과목의 답안지였다"며 "시권 27장 중 25장이 동일한 시험의 답안이었다"고 강조했다.이어 "식년시 응시자는 자비로 시지(試紙·과거 시험 종이)를 마련해야 했고, 권력 가문 자제들이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좋은 시지를 가져오는 폐습이 생기자 두꺼운 종이 지참을 금하도록 했다"며 "일월오봉도에 붙어 있던 1840년 즈음의 시권은 대부분 두껍지 않고 고급 품질 종이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재활용한 사례는 적지 않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 특별전에서 선보인 전통 예복 '활옷' 속에서도 188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바 있다.
윤 교수는 "왕실에서조차 시권을 재활용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 종이 물자가 매우 부족했던 듯하다"며 "시권을 수집해 재활용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을 고려하면 인정전 일월오봉도 병풍은 184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시권 외에도 1960년대 신문지가 보존처리에 활용됐고, 조선시대 병풍 틀이 지금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센터는 보존처리 과정에서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경복궁과 덕수궁 일월오봉도 사진 등을 근거로 녹색 구름무늬 비단에 꽃문양 금박을 붙여 장황했다. 장황은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책이나 화첩을 만드는 행위다.
보고서에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과정을 소개한 글과 사진 외에도 '인정전 일월오봉도 변형과 전통 장황에 대한 고증', '인정전 일월오봉도의 과학적 분석'에 관한 논고가 실렸다.(사진=연합뉴스)
김현경기자 khkkim@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