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진정한 역사의 무대, 바다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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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인류“염병할 놈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1498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쿠 다 가마의 선박을 본 현지 상인이 이렇게 외쳤다. 당시 포르투갈 선원들은 현지 상인 중 두 명과 대화할 수 있었다. 예상 밖 손님을 맞이한 인도인이 받은 충격 못지않게,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인과 소통이 가능한 네트워크가 갖춰져 있던 것도 놀랄 일이었다. 바다는 그렇게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사람들을 연결해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주경철 지음
휴머니스트
976쪽│4만6000원
《바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바다가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인류가 바다에 어떤 흔적을 남겨왔는지를 살펴본 책이다. 전 세계 바다를 배경으로 쓰인 인류의 희로애락이 900쪽 가까운 본문에 빼곡하게 담겼다. 책에서 다룬 지역적·시간적 범위가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나 키르티 초두리의 《인도양에서의 무역과 문명》 등 해양을 배경으로 한 역사 대작들보다도 훨씬 넓다.인류사의 시작부터 바다는 땅만큼이나 중요했다. 역사의 무대는 육지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지구상 거의 모든 대륙과 섬으로 확산해 나가는 데 육로만큼이나 해로가 중요했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광대한 지역에서 대규모 해상 이동이 벌어졌다. 원양항해는 선사시대부터 이뤄졌다.
바다를 매개로 한 교역의 흔적은 깊이 아로새겨졌다. 지중해 밀로스 섬에서 산출되는 흑요석은 1만5000년 전부터 광범위한 지역에 유통됐다. 기원전 5000년께 이라크 북부 무덤에 부장된 목걸이는 800㎞ 떨어진 페르시아만에서 나는 조개로 만들었다. 수메르 설형문자 자료에는 선박 관련 전문 용어만 400개가 넘게 등장한다.수많은 분쟁이 바다를 배경으로 벌어졌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13~12세기 바다민족의 침략으로 고전했다. 카르타고의 나포 선박을 분석해 ‘리버스 엔지니어링(역설계)’한 로마는 대선단을 구축한 뒤 역으로 한니발의 활동 무대를 육지로 한정시켰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간 치열한 패권경쟁이 벌어지는 무대도 남중국해를 비롯한 바다다.
무엇보다 바다는 교환의 공간이었다. 상인과 선원, 여행자와 종교인들은 인도양의 몬순을 이용해 오가면서 향료와 대모(거북 등껍데기), 청금석, 산호, 후추를 주고받았다. 9세기 중국 도자기 제작자들은 아바스 왕조와 페르시아, 불교도를 겨냥한 맞춤형 상품을 판매했다. 동방의 구법승들은 해로로 인도, 스리랑카를 찾았고, 불교 관련 책과 향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엮였다. 바이킹은 영불해협에서 아이슬란드, 발트해 연안까지 떨어져 있던 지역을 연결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815년 빈 조약에서 승전국 영국은 대륙 내의 거점이 아니라 전 세계의 주요 해양 거점을 얻어 대제국을 일궜다. 1898년 전 세계에 20만9000㎞의 케이블망을 소유했던 영국 제국은 해저 전선으로 운영됐다.바다 덕분에 인류는 먹고살았다. 페니키아인들은 참다랑어를 소금에 절여 수백~수천㎞ 떨어진 곳까지 수출했다. 1400년께 한 해 3억5000만 마리의 청어를 잡았던 한자동맹 도시들은 염장 청어로 유럽인들을 먹여 살렸다. 포경업을 중시했던 미국은 자국에서 건조한 포경선이 세계의 바다로 나가는 것을 국가적 위용의 표시로 여겼다.
부끄러운 일들도 바다를 매개로 이뤄졌다. 포토시 은광과 남미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운영을 위한 노예무역과 강제노동은 대서양 항로가 있어 가능했다. 유대인 매춘 조직은 동유럽 여성들을 남미로 내다 팔았다.
때론 바다에 관한 정치 권력의 선택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다. 바다 대신 대운하를 선택한 중국은 대륙 내부에 갇혔다. 62척의 대형 선박과 200척의 소형범선, 2만7000명이 동원됐던 정화의 대함대를 포기한 중국의 해상력은 19세기 초 동인도 회사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반면 대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를 손에 쥔 영국과 미국은 최강국으로 올라섰다.기술 발전은 바다의 물리적 거리를 크게 좁혔다. 1866년 중국에서 영국으로 ‘차(茶) 운송 대 경주’를 벌였던 고속범선 클리퍼들은 스케줄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증기선에 자리를 내놨다. 이점바드 브루넬은 1846년 철제 대형선이자 스크루 추진선을 건조하며 더 크고 튼튼한 선체를 선보였다.
바다는 점점 더 소통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활발해진 19~20세기의 무역량이 이전 300년보다 1600배나 늘어난 점이 이를 증명한다. 더는 ‘글로벌 해양사’에 무지한 것이 용인될 수 없는 때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