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50억 투자사가 7조 '뻥튀기 베팅'…경을 친 LG엔솔 청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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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공개 새 역사 뒤엔 '사모펀드의 편법'

"공모가 올라 결국 개미들 피해"
사진=연합뉴스
1경5203조원. 올해 기업공개(IPO) 시장 최대어(魚)로 꼽히는 LG에너지솔루션 청약에 뛰어든 기관들이 써낸 주문금액이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1조원의 1만 배인 1경원을 1만원짜리 지폐로 이어붙이면 지구를 3600만 번 이상 휘감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허수(虛數)가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묻지마 베팅’ 탓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선 한탕을 노린 사모펀드의 일탈과 허술한 제도를 방치한 금융당국이 빚어낸 촌극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자본금 50억원에 불과한 A투자자문사는 이번 기관 청약에 7조원을 베팅했다. 최대치를 적어냈다. 현재 제도상 자본금 50억원 자문사가 받을 수 있는 주식은 200억원어치지만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해 이렇게 써냈다. 일반청약자는 청약금액의 50%를 증거금으로 내야 하지만 기관투자가는 청약증거금이 없다는 제도적 허점을 파고들었다. 금융당국은 2007년 공모주 청약 흥행을 위해 기관투자가들의 증거금을 없앴다. 이번 LG에너지솔루션 수요예측에서 국내 기관 1536곳, 해외 기관 452곳 등 총 1988개 기관이 참여해 경쟁률을 2023 대 1까지 올린 배경이다.앞선 카카오뱅크, SK아이이테크놀로지 청약에서 체득한 결과다. ‘대형 공모주는 흥행 불패’라는 공식이 생기면서 이 같은 관행이 생겼다.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선 증거금을 내지 않은 채 ‘뻥튀기 청약’에 나서는 기관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과도하게 높은 경쟁률을 형성해 결국 공모가를 높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추덕영 기자
그동안 기관투자가, 특히 사모펀드들이 제도적 허점을 활용해 공모주 시장을 흐리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를 막기 위해 규제책을 내놓을 경우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 금융당국은 주저하고 있다. 업계에선 베팅에 제한이 없는 사모펀드가 이 같은 역대급 기록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증권 인수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사모펀드가 적어낼 수 있는 주문 금액의 상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증거금을 내지 않는 대신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21일까지 배정 물량 100%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만 달렸다. 한 전문사모운용사 관계자는 “공모주 청약 시장에서 정직은 곧 바보인 셈”이라고 말했다. 전문사모운용사들은 주관사인 증권사들에 책임을 돌렸다. “공모주 배정이 정확히 어떤 기준에 의해 이뤄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큰 액수를 써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증권사들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수요예측 이후 단 이틀 만에 공모가를 산정하다보니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 대형 증권사 IPO 담당자는 “많게는 2000개에 달하는 기관이 참여하다보니 이틀 만에 이들의 능력과 적당한 배분 주식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기관들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금융당국과 금융투자협회 등 관련 제도를 책임지고 있는 곳들도 규제를 말하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새로운 규제를 내놓은 뒤 IPO시장이 위축되면 그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사이 전문사모운용사들은 최대 1000%에 달하는 수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월 설정된 한 하이일드 펀드는 1986.28% 수익을 냈다. 다른 코스닥벤처펀드도 지난해 755.21%에 달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지금 같은 상황을 방치할 경우 공모주에 뛰어든 개인투자자들에게 피해가 부메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