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쌓인 택배상자, 집콕 놀이동산으로 변신 [오세성의 아빠놀자]
입력
수정
오세성의 아빠놀자(4)
늘어난 택배상자로 징검다리 놀이
당근으로 물감 찍으며 식재료와 친해지기도
2021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마냥 예뻐해 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먹고 자는 게 다가 아니고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을 하려면 '놀이'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육아에 지친 아내를 위해 체력이 조금이라도 좋은 아빠가 나서야겠다 싶었습니다. 아빠는 처음이라 정답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편집자주]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집콕 생활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집 한구석에 쌓여가는 택배상자도 부쩍 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딸아이가 집밥에 싫증이 났는지 이유식 먹기를 거부하는 통에 잠시 시판 이유식을 먹이느라 상자가 더 쌓였습니다.
잔뜩 쌓인 상자를 분리수거장에 내놓으려는데 문득 그대로 버리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자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기어오더니 작은 손으로 상자를 팡팡 때리더군요. 아이 손을 닦아주면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상자를 놀잇감으로 삼아보자는 생각이지요.배송 과정에서 이리저리 굴렀을 상자를 그대로 가지고 놀 수는 없겠죠. 형태가 온전한 상자를 몇 개 골라 신문지를 구겨 채운 뒤, 집에 남는 포장지로 감싸봤습니다. 깨끗하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한 선물상자로 거듭나더군요.
처음에는 블럭처럼 쌓아봤습니다. 딱딱하지 않고 가벼우니 무너지더라도 다칠 일은 없겠다 싶었죠. 아이가 관심을 보이며 오더니 손으로 슬쩍 건드리네요. 상자 하나를 내려주니 손으로 팡팡 때리며 좋아하면서도 높게 쌓인 상자를 건드리진 않았습니다. 자기 키보다 높은 상자가 흔들려 무서웠던걸까요.전략을 바꿔 바닥에 상자 징검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손을 잡아주고 징검다리 위를 걷게 하려구요. 이제 10개월이 된 딸아이는 손을 잡아주거나 벽을 짚으면 휘청이면서도 곧잘 걷곤 합니다. 아빠 손을 꼭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성취감도 느끼고 아빠와 긍정적인 스킨십도 쌓이겠구나 싶었죠. 역시나 제 착각이었습니다. 아이가 발을 떼지 못하더군요. 발에서 느껴지는 낮선 촉감과 다소 흔들리는 발판에 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손을 잡아주면 열심히 발을 내딛는 아이라 상자 위에서도 쉽게 걸을 줄 알았는데, 과한 기대였나봅니다.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앉히고 손을 놓아줬습니다. 그리고 상자를 치우려는데 딸아이가 "끙차" 소리를 내며 상자 위로 기어오르더니 활짝 웃네요. '아빠, 아직 상자 위에서 걷는건 무섭지만 기어서 가는건 괜찮아요'라는 듯이 말인 것 같습니다.
반대편으로 가 앉으니 딸아이가 "꺄아아" 괴성을 지르며 기어왔습니다. 다만 상자가 무게를 버티지 못해 밀려나면서 완주에는 실패했습니다. 상자 사이로 떨어진 딸아이는 다시 눈을 맞추며 만족스럽다는 듯 활짝 웃어줬습니다. 어찌됐든 즐거워하니 절반의 성공일까요.어차피 상자는 많으니 아이가 돌이 되면 다시 시도해보려 합니다. 쉽게 걷는다면 상자 표면에 빨대나 주름종이, 비닐 같이 여러 재료를 붙여 다양한 촉감을 느끼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기왕 판을 벌인 김에 한 가지 놀이를 더 해봤습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전지를 펼친 뒤 물감놀이를 준비했습니다. 시판 이유식 그릇에 물감을 풀고 이유식을 만들다 남은 당근을 잘라 흰 종이에 형형색색의 도장을 찍는 놀이죠.
처음에는 물감에 밀가루도 섞어 손으로 직접 찍는 놀이를 하려 했는데, 제 손에 실험해보니 물감이 잘 안 닦이더라구요. 지켜보던 아내도 "손으로 하면 애 입에 물감 들어간다"며 한 소리를 했습니다. 이번엔 시행착오가 많네요. 아빠는 처음이니 어쩔 수 없겠죠.그간 딸아이가 식재료와 친숙해지도록 종종 이유식을 만들다 남은 재료들을 손에 쥐어주곤 했는데, 그 덕분인지 딸아이는 당근 도장도 거부감 없이 잡았습니다. 종이에 찍는 모습을 보여주니 바로 따라하네요. 팡팡 내려칠 때마다 물감이 찍히니 신이 났는지 "꺄꺄" 소리를 질러댑니다. 전지 위를 기어다니며 힘차게 당근 도장을 찍느라 팔에도 옷에도 물감이 잔뜩 묻었습니다. 결국 물감 놀이가 목욕 시간으로 이어졌네요.
놀이를 하느라 팔뚝에 묻은 물감을 닦아주면서 아이가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기는 것도 못해 누운 채 팔다리만 바둥거렸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더군요. 거품을 씻어내는 동안 지지대를 잡고 서있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한편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딸 정말 많이 컸다"고 하니 어디서 배웠는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네요.
피식 웃으면서 문득 부모님도 저희를 보며 이런 기분이셨을까 싶어졌습니다. 본인이 낳은 갓난쟁이가 어느새 커서 결혼을 하고, 자기 닮은 갓난쟁이까지 낳았으니 말입니다. 휴일에 먹을거리를 사들고 찾아뵈어야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같이 즐기며 "나 때는 어땠어요?"라고 물어보면 밀렸던 추억 보따리가 풀리지 않을까요.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