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움직이는 '보이는 손' 국민연금…기업들은 '초긴장' [류은혁의 기업분석실]

국내 증시 팔아 치우는 국민연금
국민연금 대표소송 논쟁까지…

"책임 투자" vs "소송 남발" 의견 분분
소액주주들, 경영진 견제 수단 미미
"국민연금 눈치라도 봤으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국민연금지부 등 노조 및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달 24일 서울시 서대문구 국민연금 충정로 사옥 앞에서 일부 기업들에 대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를 촉구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주식시장에선 '큰 손'인 국민연금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보유 지분을 낮추거나 공격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경우 주가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최근 부실시공 논란에 휘말린 HDC현대산업개발 주가가 급락했다. 국민연금이 이 회사의 주식 대거 팔아치우면서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지난 11일부터 21일까지 9거래일 연속 하락했다. 이 기간 국민연금의 지분율도 지난해 말 기준 769만2326주(11.67%)에서 641만4813주(지분율 9.73%)로 줄었다. HDC현대산업개발 주가는 9거래일 연속 내리며 44.96% 급락했다. 시가총액도 1조7000억원에서 93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사실상 국민연금 매도 물량이 하락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포스코의 '물적분할'을 통한 지주사 전환 안건에 찬성 의결권을 던지기도 했다. 이 덕분에 포스코는 2000년 10월 민영화 이후 21년 만에 투자형 지주회사(포스코홀딩스) 아래 철강 등 사업 자회사를 두는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앞서 국민연금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물적분할에 대해서는 주주가치 훼손 등을 이유로 반대한 바 있다. 시장에선 국민연금이 전례와 달리 포스코의 물적분할에 찬성한 이유와 관련해 포스코가 사실상 자회사를 상장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을 정관에 포함하면서 소액주주들의 우려를 잠재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국민연금은 국민의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맡겨진 돈이다. 그 자금을 안정성과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해서 운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다. 최근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시장에선 국민연금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동안 찬성도 반대도 아닌 '회색지대'를 택하던 국민연금이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입김 더 세지나…국민연금 대표소송 두고 말말말

올 들어 주식시장에선 '소송'이란 단어가 자주 들린다. 오스템임플란트 횡령, HDC현대산업개발 아파트 붕괴, 셀트리온 분식회계 의혹, 신라젠 상장폐지, 카카오그룹 경영진 먹튀 논란 등 일련의 사태로 주식시장이 시끄럽다.

최근 금융투자업계에서 가장 큰 화두는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이다. 이 소송 제도는 경영진의 결정이 주주의 이익과 어긋날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표해 회사에 손실을 끼친 경영진에 대해 소를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즉 피해를 야기한 대표 등 경영진에게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 진행된다. 피해보상도 회사에게 이뤄진다.
사진=뉴스1
겉으로 봤을 땐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에 대한 경영 감시나 책임 묻기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소액주주들은 환영의 박수를 친다. 올 들어 여러 기업이 저지른 몰상식한 행위 때문에 기업가치가 추락하면서다. 향후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이 개미들의 권리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바램이 깔려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과 관련해 적지 않은 부작용도 있다. 일각에선 기업이 소송에 휘말리는 것은 국민연금의 '제 살 깎아 먹기'이며, 운용수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작년 3분기 말 기준 국내 주식시장에서 약 164조원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파워 앞에서 기업들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재계에선 불필요한 소송이 남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특히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국민연금이 주주대표소송이란 명목으로 기업 길들이기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재계는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이 결국 기업의 경쟁력을 깎아내린다고 말한다. 국민연금 본연의 임무인 수익률 제고와 무관하게 정치·사회적 이해관계나 여론에 편승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은 대표소송과 관련해 회사 '이사'의 '위법행위'가 대상이며, 회사의 경영활동에 간섭할 여지는 없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 소송제기 기준도 회사 이사가 업무상 배임 및 횡령혐의,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공정거래법 위반, 입찰담합 등 '위법행위'를 저질렀을 때로 한정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기업들은 이러한 경우에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라면 담합'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공정위는 농심·삼양식품·오뚜기·팔도 등 4개사가 2001년부터 약 10년간 담합을 통해 출고가격을 부당하게 인상했단 이유로 13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이 사건의 여파는 해외로도 번졌다. 이듬해 미국의 도·소매상들이 한국 내 라면 가격담합으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이들 4개사를 대상으로 집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농심은 즉각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정공방을 거쳐 최종 승소했다. 공정위는 농심에 대한 과징금 1077억원을 환급한 것은 물론, 이자 성격의 환급 가산금 94억원까지 지급해야 했다. 만약 여기에 국민연금 소송까지 제기됐으며, 그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기업이 책임 먼저 답해야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의 73%는 소송 대응력이 미약한 중견·중소기업으로, 무분별한 주주 대표소송이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코스닥업계 한 관계자는 "코스닥 상장사라고 해서 무조건 큰 기업이란 인식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일부 코스닥 상장사들은 법적 분쟁에 휘말리며 본업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작은 규모의 회사도 있다. 무분별한 소송은 결국 코스닥 같은 소규모 기업의 경쟁력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소액주주들이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을 반기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표소송은 결국 불법행위를 저지른 이사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LG에너지솔루션 사례처럼 물적분할된 기업의 중복상장, 카카오의 '먹튀'나 다름없는 경영자의 스톡옵션 주식매각, HDC현대산업개발의 대형참사로 인한 주가하락 등으로 소액주주들은 뜻하지 않게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정작 책임을 따져보려고 해도 약자인 소액주주들의 선택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책임 소재를 묻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개인투자자가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문제를 야기한 오너나 경영자가 주식을 완전히 다시 사들이거나 보상해주는 것도 아니다.

소액주주들은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에 앞서 기업들이 책임에 대한 먼저 언급해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소액주주들만의 결집으론 기업 경영진을 상대하기는 벅차기 때문이다. 차라리 국민연금이 나서서 기업들이 눈치라도 봤으면 하는 심정이 깔려있다.금융투자업계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한 관계자는 "주주대표소송이 남용될 것이란 우려에도 소액주주들 사이에선 견제 역할이 필요하다는데는 공감을 한다"면서도 "재계 주장처럼 주주대표소송이 과잉제재로 변모하면 시장의 질서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기업이 앞장서서 책임에 대해 논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류은혁 한경닷컴 기자 ehryu@hankyung.com